강성분 자연농 농부
▲ 강성분 자연농 농부

“야! 너 몇 살이야?” “여섯 살!” “난 일곱 살! 너 나한테 까불면 안돼.” 키즈파크의 수영장에서 어느 여자아이와 우리 아들 사이에 오고간 첫 대화이다. 다행히 아들은 누나들을 좋아하기에 까불면 안 된다는 말에도 의기소침해지진 않은 것 같았다. 어쨌든 여자아이의 말투는 사뭇 명령조였고 아들도 어느새 잘 따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이들은 끝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헤어질 때까지 서로를 ‘야’와 ‘누나’로 불렀다. “산아! 친구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 “친구 아냐. 누나야.” “누나도 친구 될 수 있어.” “아니야!” 한 살차이 때문에 이 아이들은 친구가 아니었다. 만약 이 아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면 어땠을까? 세 살배기 둘째 아들의 튜브를 끌며 놀아주던 다른 여자아이가 큰 아들에게 관심을 보이더니 역시나 대뜸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내가 먼저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가씨. 나이말고 이름 물어봐요.” 아이는 쑥스러운 듯 씩 웃더니 “이름이 모야?” “김산” “김산! 너 수영잘해?” “어. 내가 실험하는 거 보여주까?” 아들은 여자아이 앞에서 열심히 자신의 몸으로 수영을 실험했다. 둘은 금새 친구가 되었고 아까와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였다.

한국인들은 거의 대부분 상대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하기 이전에 나이부터 묻는다. ‘너 몇 살이야?’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심지어 ‘몇 학번이세요?’라는 말로 나이와 학력을 동시에 접수한다. 나이를 먼저 묻는 이유는 대체 무얼까? 수영장에서 오고 간 아이들의 대화에 답이 있을게다. 너 나한테 까불면 안돼. 바로 서열의 정리다. 서열의 정리가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만 서열의 정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소통의 부재와 그로인한 사회적, 문화적 손실도 매우 클 것이다.  나는 몇 년간의 해외생활을 하며 참 훈훈한 장면들을 목격했었다. 길거리 농구를 하는 청년들 틈에 할아버지. 아버지뻘 되는 어른들이 종종 끼어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훈훈해 보일수가 없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들이 친구로서 진실한 우정을 나누는 것도 보았다. 가끔 이웃 할머니의 쇼핑봉투를 들어다 드리며 말동무가 된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친구로 소개했다. 사실 그때까지도 노인공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나는 뭔가 한방 맞은 것 같았다. 내가 그녀를 다른 사람에게 이웃 할머니라고 소개했다면 얼마나 멋없을 것인가? 단언컨대 인생이란 공경받기보단 친구가 많은 것이 훨씬 재밌고 행복하리라.

이미 어린 아이들의 삶에까지 칙칙한 색깔로 스며든 이 문화를 어이할꼬 싶긴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아이들은 더 재밌고 밝은 것들을 더 잘 배우고 삽시간에 퍼뜨린다. 우리 아이들이 더 폭넓은 인간관계와 유연한 사고와,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면 나와는 좀 더 다르게 좀 더 밝은 세상을 만들지 않을까? 아들들아 부탁한다. 나도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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