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분(자연농 농부)
▲ 강성분(자연농 농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건망증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가물거렸다 / 생을 메모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기억해야지 / 그리고 나에게 주어졌던 폰을 찾아가야겠다 / 오늘도 벨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제 사십대 중반일 뿐인데, 나는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며 안면인식장애는 물론, 하루에도 수 십번 전화기를 찾아 헤매고, 장을 볼 때면 꼭 한 두 가지씩 빼먹고 온다. 예방 차원에서 메모를 해보지만 그 메모지조차 잃어버리기 일쑤다. 그런데 나보다 더한 여인이 있으니 바로 내 앞집에 사는 이웃언니다. 그녀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지런하며 넘치는 상상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막강 건망증의 소유자다. 언젠가 그녀가 마트를 나와 주차장에 있는 차문을 열었다. 왠 아저씨가 타고 있었다. 그녀는 차도둑과 맞닥뜨렸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누구신데 제 차에?” “내 차인대요.” 그제야 차안의 다른 분위기가 눈에 들어오며 제정신이 들었단다. 그런 일이 한번이 아니었다. 그녀가 차에 타서 옆자리에 지갑을 던지고 핸들을 잡는 순간 핸들커버가 색다른 느낌이 들었단다. 차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차를 튀어나와 자신의 차를 제대로 찾아 타고 허겁지겁 돌아왔단다. 그날 저녁 그녀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서였다. 자기 차에 모르는 사람의 지갑이 떨어져있다고 어떤 사람이 신고를 했단다. 그녀는 그제서야 지갑을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사정을 설명하고 차주에게 감사하고 미안해하며 사건을 마무리 지었지만 차주인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이것은 웃긴 일이 아니다. 아주 슬픈 일이다. 우린 가끔 두 손을 마주잡고 진지하게 서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늙어서 더 심각해지면 둘이 조용히 떠나자고. 그런데 우리보다 젊은 예비 치매인들이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그녀의 손님 중 한 젊은 처자가 주유소 화장실에 들렀다가 잃어버리고 온 지갑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단다. 바로 일주일 후, 또 한 손님이 올레길에 잃어버린 지갑을 서울로 돌아 간 후 역시 돌려받았다고 한다. 발견한 농부가 지갑만 달랑 보내기 그렇다고 귤까지 한 박스를 보내주었다며 기뻐서 전화가 왔더란다. 우린 하이파이브를 치며 “이야~! 제주도 아직 살만하네~!”하고 외쳤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위의 세 사건이 한 달 안에 일어난 일이니 분명 유의미한 확률이다. 증거는 더 있다. 얼마 전 알고 지내는 동생이 길을 잃은 듯 보이는 할머니를 차에 태워 가까운 경찰서에 모시고 갔더니 치매 노인인데 자주 있는 일이라 했단다. 사실 나도 똑같은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 할머니가 종종 그렇게 돌아 다니셔서 사람들이 모시고 옵니다.”라고. 이웃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뒷담화의 근원이라고 폄훼했던 나의 오만함이 처형을 당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그러한 관심이 유, 무형의 공동체가 되어 이곳을 아직 살만한 세상으로 유지해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앞집 언니와 나는 손잡고 조용히 안 떠나도 될지 모른다. 누군가 늙은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작권자 © 제주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