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해, 우리고장 산야(山野)에는 소나무의 울음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단순한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처절하였다. 온 섬을 짙푸르게 감싸주던 그 소나무들이 영문도 제대로 모른 채 마냥 스러져 갔다.
소나무하면 얼른 연상되는 구절이 애국가 제2절이다.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철갑(鐵甲)이라면 쇠로 만든 갑옷이다. 그 튼튼한 쇠 옷을 입은 소나무를, 어떻게 한낱 ‘재선충병’이라는 괴질에게 맥없이 당하도록 내버려뒀단 말인가. 인재(人災)가 확실하다. 사람들이 잘못했다.
그 ‘솔(松)’이 어떤 나무인데,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방비상태로 있었는가. 답답하고 애석하다. 우리 조상들은 일생을 소나무와 더불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달민족의 숨결이 배어있는 소나무는 정중하고 엄숙하며 고결하다. 항상 변치 않고, 주변자연과도 잘 어울리는 품성을 갖추었다. 온갖 풍상(風霜)을 이겨낸 옹골찬 기백은 굳은 절개와 의지의 표상이다. 그래서 추사(秋史)선생도 그의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에, 잣나무와 함께 소나무를 그리지 않았을까. 귀양살이의 고통 속에 ‘겨울이 되어야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의리와 정절의 뜻으로 표현했을 법도 하다.
소나무 얘기를 좀 더해보자. 소나무는 어디서든 대할 수 있는 수종(樹種)이어서, 친근한 ‘벗’만큼이나 정답게 생각해 왔다. 그런가하면 ‘흔한 것은 귀(貴)하지 않는 것’처럼, 땔감용으로 소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나무는 꿋꿋하다. 사육신 성삼문의 소나무는 자못 서슬이 퍼렇다. 낙락장송(落落長松)이요, 독야청청(獨也靑靑)이다. 큰 벼슬에도 올랐다. 속리산의 ‘정이품송(正二品松)’. 정이품이면 판서대감으로 지금의 장관급이다. 품격이 높아 연륜이 쌓일수록 기품이 있다. 소나무는 사철 내내 푸르러서 건강과 장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수복강녕(壽福康寧)을 염원하는 ‘십장생도(十長生圖)’에 소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다. 또 소나무는 재앙과 악귀를 막아주는 영목(靈木), 동네를 수호하는 동신목(洞神木)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이때의 소나무는 신령(神靈)과도 같기에, 함부로 손을 대거나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산방산 굴사(窟寺)앞의 거목(巨木)이 바로 이 ‘신성수(神聖樹)’에 해당될 터이다. 수백 년간 산방산의 상징(象徵)으로, 주민들의 기상(氣像)으로 묵묵히 산과 마을을 지켜온 소나무. 이 거송(巨松)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천년 솔, 만년 팽(퐁낭)”이라고 하시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소나무는 적어도 천년까지는 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산방산 소나무는 비명횡사(非命橫死)임이 분명하다.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2013 계사년 12월 24일. 사계리민들은 원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사과와 위로를 겸한 이별의 고사를 지냈다. 이제 이 노거수(老巨樹)는 이달(3월) 중순께 베어져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후세에서라도, 억울하게 고사(枯死)한 도내 모든 소나무들과 더불어 천년장명하기를 빈다.
그동안 산방산 소나무는 노송(老松) 거송(巨松) 장송(長松) 고송(古松)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이승을 작별하는 마지막 마당에, 우리 언론들은 한결같이 ‘신목(神木)’으로 추증(追贈)하여 주었다. 슬픈 중에도 그나마 고맙고 위안이 되는 명명(命名)이리라.
- 기자명 제주매일
- 입력 201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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