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시인/소설가)
▲ 김관후(시인/소설가)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세계를 움직인 신학자이다. 그의 기도 중에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 차분한 생각을 가지고 정리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변화시킬 수 없는 일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라는 내용이 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곳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는 과연 무엇일까?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 그리고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곧 우리의 성급함, 이기주의, 쉽게 등을 돌리는 것, 사랑과 관용의 결여 등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하나 둘인가?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쌓이고 쌓였다. 우리의 성급함과 이기주의 때문에 투표소에서 잘못 도장을 찍는 경우가 있다. 현직 도지사는 ‘성추행 노란’과 ‘간첩기자, 4·3폭도’ 발언으로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군사독재였던 시절, 민주화의 불꽃은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있었던가? 우리는 시대의식을 공유하면서 정정당당하게 군부를 향하여 입을 열었던가? 지금은 끝없는 경쟁과 승자독식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지금, 우리는 그것에 당연시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과연 우리의 내면에 존재나 하는 것일까?

그 어두운 시절, 거리에 붉은색을 못 쓰게 한 적이 있다. 일종의 <레드 콤플렉스>였다. 새누리당이 붉은색을 아예 간판격으로 사용하고, <붉은악마> 함성이 거리를 누비자 레드 콤플렉스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대의식을 갖는단 말인가?

역사의식은 곧 시대 의식이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면서 고민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식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행동하는 것이 역사의식이요, 시대의식이다. E. H.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우리 근현대사 해석은 '대화'가 아닌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주역사 역시 더욱 그렇다.

우리는 정의로운 공동체를 원한다. 정의로운 공동체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고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바로 그 중심에 대화가 존재한다. 지금처럼 하나하나 알알이 다 흩어진 상태에서는 연대가 없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 힘쓰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바로 대화가 없으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원로학자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종북좌파' 공세에 대해 "차라리 종북을 희화화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화북(和北)주의자이고 공북(共北)주의자"라고 말했다. 얼마나 멋진 대답인가?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북주의자로소이다"라고 커밍아웃(coming-out)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찾다보니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느끼는 변화는 그 중간에서 우리의 수준에 인식되는 하나의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진행되어온 변화의 기록을 우리는 '역사'라 부른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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