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학력고사ㆍ사법고시 ‘수석’ 진기록 전국적 유명세
2000년 정치에 ‘첫 발’ 디디며 보수정당 개혁의 ‘아이콘’으로

[제주매일 고재일 기자] 원희룡 제주도지사 당선인은 1964년 서귀포시 중문동 태생으로 중문초등학교, 중문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입학 당시 학력고사 전국 수석,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으로 화제가 된데 이어 92년 사법시험(당시 사법고시)에서도 수석 합격해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 고무신만 신고 다닌 가난한 농부의 아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원 당선인은 중학시절 내내 운동화는 고사하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배를 굶고 다니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5살 때에는 리어카 바퀴에 발가락이 끼는 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를 받지 못해 기형으로 뒤틀리는 장애를 갖게 된다. 당선인은 이로 인해 훗날 병역을 면제받게 됐다고 설명했다.

부모가 서점을 하다 폐업한 관계로 어린시절부터 원 당선인의 독서환경은 풍요로웠다고 한다. 책을 장난감 삼아 온갖 종류의 책을 무작정 펼치고 들여다보고 또 보는 일을 반복했다. 독서광으로 알려진 그의 밑바탕인 셈이다.

▶ 대입학력고사에 사법고시 등 전국 ‘수석’ 타이틀

세상에 ‘원희룡’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바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이전에 시행됐던 1982년의 학력고사에서다. 원 당선인은 당시 340점 만점에 332점을 획득해 전국 수석의 타이틀을 갖고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한다. 때문에 도민들은 ‘원희룡=전국 수석’이라는 이미지를 그리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많은 관심을 보여왔다. 원 당선인의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로는 이번 서울시장 새누리당 경선에 참여했던 이혜훈 최고위원과 나경원 전 새누리당 최고위원,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김난도 교수, 조국 서울대 교수 등 이른바 대한민국에서 잘 나간다(?)는 보수와 진보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두루 포진해 있다. 그러나 원 당선인은 대학 입학 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신군부가 전투경찰과 사복경찰, 정보기관 요원 등을 학내에 투입해 시위하는 학생들을 검거하는 모습을 보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당선인은 노동운동을 하면서 살겠다고 결심하고 야학과 노동운동에 투신해 활동하던 중 유기정학 처분을 당하게 된다. 이후 원 당선인은 낮에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고된 삶을 이어갔다. 원 당선인은 당시 느꼈던 우리 사회의 지역 연고와 이념적 독기에 대한 고민이 향후 정치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당선인은 그러나 1987년 민주화와 1989년 동구권의 몰락을 지켜보며 학생운동에서 서서히 발을 떼기 시작한다.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어졌던 그의 이름이 1992년 전국 수석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다시 회자된다. 법조계에 발을 들인 원 당선인은 서울지검과 수원지검 여수지청, 부산지검 등에서의 4년여 검사로 재직하고, 이후에는 2년간 변호사 생활을 거쳤다.

▶ ‘젊은 피’ 바람 타고 한나라당 입당...정치 활동 시작

원 당선인은 2000년 제16대 총선 직전 당시 거세게 불어 닥친 ‘젊은 피’ 수혈 바람을 타고 곧바로 정계에 입문했다.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정치권 선후배들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쳤고, 그는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구애’에 응해 서울 양천 갑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를 이루겠다고 천명한 원 당선인은 곧바로 소장파 정치인들의 모임인 ‘미래연대’(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를 결성해 보수적인 당 노선을 비판하며 여권 내 개혁파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노동운동을 하던 진보성향의 원 당선인이 보수성향의 당시 한나라당을 선택한데 대해서는 뒷말이 무성했다. 일각에서는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김민석 전 민주당 최고위원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판에 끌어들이자 이에 대한 경쟁심리로 한나라당을 택한 것이 아닌가라는 관측을 하기도 한다. 

원 당선인은 정치 활동 내내 ‘주류 세력’과의 긴장을 이어간다. 주요 현안마다 당내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 일쑤였고, 때문에 당 안팎에서 거센 비난과 비판, 이념 공세에 직면하기도 했다. 17대 총선 이후에는 소장파 의원모임인 ‘새 정치 수요모임’을 결성하며 2004년 최고위원에 출마해 박근혜 당시 대표 다음의 득표율을 올리며 ‘최연소 최고위원’ 자리를 거머쥐며 지도부에 입성한다.

▶ 대권도전과 서울시장 도전 ‘연이은 불발’...고향 제주서 정치 재기

이후 대권도전을 선언하고 2007년 경선에 출마하지만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3위를 차지한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논란을 빚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자리를 비우게 되자 서울시장직에 도전한다. 그러나 여론 조사에서 밀리며 당내 경선 상대였던 나경원 전 최고위원에게 후보자리를 내주게 된다.

원 당선인은 2011년 6월에는 이듬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제14대 한나라당 대표 및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해 4위를 기록하며 최고 위원에 선출됐다. 이후 1년 간의 일정으로 영국과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후 지난해 8월 말 국내로 돌아왔다.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자서전을 집필하던 원 당선인에게 당시 안철수 국회의원이 접촉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상하자며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국 불발됐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 중앙당의 ‘차출론’이 불거졌던 올 2월까지만 해도 원 당선인의 제주도지사 출마 가능성은 안개속이었다. 하지만 3월 들어 출마가능성이 급속히 무게가 실렸고, 결국 3월 16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서 공식 출마 기자회견을 한 후 81일째인 6월 4일 민선 6기 제주도지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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