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옥자(수필가)
▲ 공옥자(수필가)
성서의 입장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는 아담의 장남 가인이다.
동생 아벨의 제물(어린 양)은 흠향하고 가인의 제물(곡물)은 거절하신 하나님, 성서에는 그 선택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가인은 분노했다. 그 분노는 동생을 향한 증오로 폭발한다.
“죄의 소원이 내게 있을 지라도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경고했으나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만다.
“네가 무슨 짓을 하였느냐, 땅이 아벨의 피를 받았으니,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창4.11)”
형벌은 엄했으나 하나님은 가인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떨자,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도록 증표를 주신다. 자비를 받은 것이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전능자이다. 전능자인 창조주가가 인간을 만들 때 그 본성 안에 질투와 미움과 살육의 씨를 남긴 이유가 묻고 싶어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시작된 구약은 전쟁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가인’과 ‘이스마엘’과 ‘에서’의 후손들을 ‘이삭’과 ‘야곱’의 후예들과 선별함으로써 처절한 살육의 싸움터로 내 몰았다.
출애급, 신명기, 사사기, 역대기, 열왕기는 이슬라엘 민족이, 주변 이방민족과 싸웠던 전쟁사이다.
그 시대의 이민족들 사이에는 여호와는 ‘전쟁의 신’으로 통했다. 오늘날 종교전쟁의 시원에는 창조주가 계신 셈이다.
철저한 도륙을 명령한 적국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었다. 구약성서의 도처에 그 잔인성이 넘쳐 난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한 처음에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알지 말라, 나는 검을 주러 왔노라’ 했을 만큼 악을 향한 분노가 컸다. 바리세인과 사두개인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하며 포효했다. 성전의 환전상들을 채찍으로 내몰았을 만큼 그의 노여움은 서슬이 푸르다. 그러나 그가 죄 없이 잡히던 밤에 한 남자의 귀를 자른 제자를 향하여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꾸짖는다. 더구나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을 때,
“저들은 저들의 하는 짓을 모르오니,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하셨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의 기도는 온 인류를 무릎 꿇게 만든다. 채찍과 질타가 아니라 생명을 버린 희생과 사랑으로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
 예수는 전쟁의 하나님을 평화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방민족을 전멸시키고자 했던 여호와의 분노와, 복음초기에 죄악을 향한 예수의 격렬한 질타는 오래도록 맹신자들에게 충분한 투쟁의 근거를 제공해 왔다.
중세의 십자군원정이 그렇고, 구교와 신교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그렇다.
 정의를 내세워서 무고한 파괴와 살상을 서슴치 않았다. 하나님을 등에 업은 인간의 오만과 잔인성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나라에서도 개인이 저지른 살인은 극형을 받는다. 헌데 전쟁이 가져온 대량 학살과 파괴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전쟁이 아니더라도 인생에는 풀어가야 할 난제가 겹겹이 싸였는데 우주를 왕래하는 21세기의 지성을 가지고 아직 전쟁이라니.
세상의 모든 제도와 조직의 상층에 정치가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죄 없는 예수가 죽임을 당한 것은 그 시대 지도자들의 질시와 미움이었다.
가인에게서 유래된 증오는 아직도 살아서 우리의 피 속을 흐르고 있다.
‘죄의 소원이 네게 있을지라도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간절한데 가인의 후예들은 거역의 길을 가느라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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