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용 길 행정학박사·前언론인
▲ 이 용 길 행정학박사·前언론인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총리내정자라는 사람이 ‘황당한’말을 늘어놓았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국민들을 그야말로 ‘황당’하게 만들었다. ‘남북분단’ ‘6·25전쟁’이 ‘하늘의 뜻’이라고 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미국을 붙잡아 주기 위한 섭리였단다.
그뿐만이 아니다. 35년간의 일제강점역시, 창조주의 뜻이었다고 한다. 게으른 우리민족에게는 시련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종교적인 발언이었다고 강변하고는 있지만, 도대체 수긍이 가질 않는다. 거기에다 ‘이조 500년’이라는 용어도 썼다. 이조라는 말은 과거 일본학자들에 의해 조작된 술어이다.
우리 역사상, 조선은 있어도 이조는 없다.
이조는 이씨조선(李氏朝鮮)의 줄임말로,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한낱 씨족국가나 부족국가 정도로 비하하기위해 일부러 지어낸 조어(造語)에 불과하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이조라는 국명은 쓰지 아니한다.
  어쨌든 총리후보자는 각계의 호된 비판과 질책이 뒤를 잇는 가운데 지명(指名)14일 만에 자진 사퇴하였다. 기자회견을 통해 야당 탓, 언론 탓, 여론 탓을 하며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였지만, 물러나기는 백번 잘했다고 사료된다.
비록 교회 내부에서 자신의 신앙관·종교관을 간증한 것이라고는 하나, 대한민국 행정 전반을 총괄할 국무총리가 되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었기 까닭이다. 왜 하필이면 그 무서운 민족적 수난을 굳이 ‘신의 뜻’이라고 했을까. 그의 편향된 역사관은 국민의 동의를 받지 못할, 이른바 ‘국민정서법’에 전혀 맞지 않은 사고(思考)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 반만년역사 초유의 가장 비극적인 전쟁, 민족상잔의 그 6·25를 다른 방향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인가. 이를테면 6·25를 겪으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경험했던 바를 교훈으로 하여, 국민의 단결과 국력의 배양을 도모해 나가자는 취지로 강연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마음이다.
  그렇다. 6·25의 진정한 의미는, 6·25를 ‘위대한 가르침’으로 삼아 이를 깊이 깨닫고 영원히 잊지 않으면서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국민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고 한다. 지난 6월25일은 6·25발발 6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도 우리는 어김없이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받들어 나라를 굳게 지켜나가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맹세도 해를 거듭할수록 식어지고 희석되는 분위기여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북쪽의 독재와 온갖 만행을 두둔하는 듯한 행태, 병역기피, 군기강의 해이(解弛), 무분별한 역사의식 등등 우려스러운 일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광복이 된지 겨우 5년이 되던 1950년. 이제 막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뿌리를 내리려 할 즈음, 저들은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에게 총칼을 들이대었다.
수백만의 고귀한 인명이 희생되고, 국토는 황폐화 했으며, 삶의 기본이 되는 재산은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러한 야만적 침략을 자행한 무리는 과연 누구인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아닌가.
  여기에서 우리는 힘이 없는 곳에, 자유도 평화도 없다는 진리를 터득하였다.
통일도 중요하지만 전쟁의 억제는 더욱 중요하다. 저들의 적화야욕을 분쇄할 수 있는 막강한 무력이 있어야 한다. 군사력·경제력과 외교력 그리고 정보와 과학·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분야에서도 저들을 능가하여야한다. 교육과 사회질서, 도덕적 정신무장도 긴요하다.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이룩한 뒤, ‘하나님의 뜻’ ‘하느님의 섭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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