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관후(시인·소설가)
장소(Place)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4·3유적지는 장소다. 아픈 현장 너븐숭이는, 곤을마을은, 백조일손지묘는 장소로써 무엇을 각인시키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과거를 읽어 내려가는 어떤 곳,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를 감싸고, 과거를 들춰내고, 과거를 이어가는 그리고 구체적인 역사로 구성하는 총체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현상은 감정과 같이 만져질 수 없고, 감지할 수 없는 것들로 구성된다. 장소는 주어진 것이며 우리 실존의 내용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살고 있는 모습은 솟아오름, 서있음, 열려있음이며, 이들의 의미가 인간실존의 근원 즉 ‘장소의 혼(Genius Loci)’이고, 그것이 구체화가 바로 역사의 현장이다.
한 무리의 일행이 피레네산맥을 넘고 있었다. 스페인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유대인들이었다. 일행은 붙잡혔으며, 내일이면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될 일행의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 허름한 방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1940년 9월26일, 세계적인 석학이면서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그는 스페인의 작은 해안마을에서 짧은 그의 생을 내려놓았다.
세월은 흘러 50년 후. 벤야민이 묻힌 공동묘지 옆에 그를 추모하기 위한 ‘통로’로 이름 붙여진 작은 건축 작품이 세워졌다. 해안절벽 위에서부터 바다를 향해 내려가는 사각형 통로. 바다를 향한 통로 안의 급경사 계단은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향했던 그의 여정을 말하고 있었다. 계단중간을 막고 있는 유리는 보이지만, 더 나아갈 수 없었던 그의 길이다.
‘통로’가 놓인 이후로 스페인 해안가의 작은 마을에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크기도 크지 않아 눈에 잘 띠지도 않는 작품이 절벽 위의 작은 해안마을을 세계적인 명소로 바꾸었다. 그 땅이 가진 역사성이 장소성과 함께 ‘통로’ 작품을 통해 배어나왔다. 노르웨이 건축가 노베르그 슐츠(Norberg Schulz)는 바로 그 장소를 ‘게니우스 로키’(Genius Loci), 곧 ‘장소의 혼’이라 언급했다. 장소에는 혼이 있고 그 혼이 건축에 담길 때 사람은 그 장소, 그 건축을 통해 감동을 받고 그 곳에 스며있는 아픔과 기쁨, 인생과 역사를 느낀다는 의미다. 땅에는 혼이 있다. 우리는 그 혼을 불러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며 땅의 정신이 곧 장소의 혼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장소의 혼’으로 모두에게 사랑 받는 공간으로 성장한다.
지난 달 21일, 제주4·3아카데미 ‘탐문회’ 회원들과 4·3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회원들은 첫 방문지인 곤을마을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았다. 분명 제주4·3유적지는 ‘장소의 혼’이 깃든 의미심장한 곳이다. 어찌된 일인가? 곤을마을은 덕지덕지 분칠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행정당국이 저지른 섣부른 행위 때문에 병을 앓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제주4·3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에서 세운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이 있는 안쪽 밭에는 ‘곤을동4·3유적지조감도’가 세워져 있다. 회원들의 입에서 ‘너무 조잡하다’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바닷가로 접근하기 위하여 도로를 확장했지만 당시의 상황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바닷가에 있던 방사탑도 없애버리고 거기에 돌을 재활용한 방사탑이 어느 예술단체 명의를 세워졌는데, 그 위치부터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장소의 혼’이 마구 할퀴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상처받는 곳이 어찌 곤을마을 뿐인가?
저작권자 © 제주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