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분(자연농 농부)

나는 맞고 다니던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걔한테 안 맞고 평화롭게 사는 방법은 뭘까?

꼬붕 노릇을 한다? 그건 온힘을 다해 싸워서 진 다음에 하는 거다.

돈을 바친다? 돈 떨어지면 맞는다.

피해 다닌다? 나중에 어두 운 골목에서 몰아 맞는다. 싸움은 깡이다.
“이모. 전 평화를 사랑한다고요.”

그래서 난 ‘평화’란 낱말의 허구를 고발하고자 한다. 요즘 평화란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이 바로 ‘평화적 촛불시위’가 아닐까 싶다. 몇 년 전 소년, 소녀들이 촛불을 들었다. 그것도 어른들한테 선동되거나 군중심리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하나 개인의 자격으로 개인의 권리를 위해 그들이 나섰었다. 이에 감읍한 어른들은 한 발짝씩 촛불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결국 거대한 촛불의 파도를 이루었다. 진짜 무언가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가 평화시위로 얻어 낸 것은 많지 않았다.

바로 그 ‘평화’란 단어의 위대함에 발목이 잡혀서다. 마치 다른 무엇도 아닌 평화를 위해 촛불을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수구언론은 오히려 이 ‘평화’라는 관념을 무기로 국민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두는데 성공했다. 마치 평화를 깨뜨리면 모든 요구조건이 무의미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평화의 테두리에 시민을 가두어 놓은 다음 그들은 마음껏 모든 걸 해치웠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평화’를 들이댔다. 국민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을 행할 때 저항하는 것을 ‘정치적’이라며, 당신들은 ‘정치적이면 안 된다’며 윽박지른다. 결국 거대했던 촛불시위는 더 작지만 강한 송곳니를 지닌 육식 공룡에게 갈갈이 찢기 듯 초식 공룡이 되어 무력하게 죽어갔다. 

아무래도 우리는 평화를 너무 사랑하나보다. 그래서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 주장하며 늘 침략전쟁에 시달렸나 보다.

그래서 외세를 끌어들인 친일파를 용서하는데 머물지 않고, 다시 권력까지 쥐어 주었나 보다. 혼자 살겠다고 한강다리 끊고 도망갔던 대통령이 돌아와, 살아남은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 다시 권력의 정점에 섰음에도 곳곳에 동상을 세워 감사히 여기나 보다. 당시 대통령 역시 평화를 너무 사랑해서 국민과 합의 없이 국군통수권을 남의 나라에 줘버렸나 보다.

또 다른 대통령이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폭도로 몰아도 평화를 위해 언론들은 그 오랜 세월을 침묵했었나 보다. 평화의 댐을 만든답시고 코 묻은 돈까지 갈취하고도 29만원밖에 없다는 소리를 감히 하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 어쩌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 후로도 우린 말만 바꾼 국토파괴행위를 막지 못했고 20개월 미만의 소고기를 얻지도 못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싣고 가던 배가 침몰하여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청년들이 가학행위에 죽어가도 진실을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대로라면 평화는 무기력하다.

진정한 평화는 비폭력이 아니라 힘의 균형에서 온다. 우리들의 평화는 우롱 당했다. 변화를 원한다면 그럴싸한 관념이 만들어낸 한계선을 넘어야 한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건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공허한 위안이고 변명이다. 평화는 너무 자주 순수한 사람들을 배신한다. 힘센 깡패에게 덤비지 못하는 게 평화가 아니다. 강하게 반격하여 다시는 때릴 엄두를 내지 못해 결국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이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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