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유독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을 따지기를 좋아한다. 같은 문중 출신이면 무조건 손을 든다. 같은 마을, 같은 학교 출신이면 한 수를 접는다.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기준은 뒷전이다. 그것을 은근히 조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데, 같은 문중이고, 같은 지역 출신이며, 같은 학교를 나왔다면 이보다 더 기막힌 인연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출신 지역에 대한 애착이 향토애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공동체 의식으로 전환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 문중의 형태로 나타나는 가문의식, 그리고 학벌을 형성하는 동창의식도 같은 집안 또는 같은 학교를 매개로 삼아 서로 돈독한 정을 나누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일종의 미풍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연고주의로 확대되고 ‘연줄’을 근거로 한 분파적 행태로 변할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출신 지역에 대한 애착이 다른 지방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발전되고, 가문과 동창의식이 저들끼리 뭉쳐 외부에 대한 부정적 태도로 변할 경우, 그것은 지역감정과 파벌의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와 너를 가르는 또 다른 경계가 아닌가.

 같은 범주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동일성을, 다른 범주안의 사람들에게는 차이점을 무조건 부각시키면서, 끼리끼리 편을 나누는 행태야말로 우리 사회의 폐쇄성과 부패의 온상에 다름 아니다. 온갖 협잡의 탯줄이다.

연줄은 숙명적인가

연줄은 비공식적 수단을 함축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파당적 연결망’이다. 이 연줄은 공적 제도에 대한 불신과, 그러한 제도를 연줄로 대체하려는 구조적 관성에 의해 강화된다.

그러나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으로 구성된 연줄은 단순한 개인적 관계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효과적인 자원을 얻는데 필요한 개인적 배경이다.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을 닿을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에 다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 복합체는 숙명적이다. 그리고 권위적이다. 그것은 한번 만들어지면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숙명적 네트워크다. 여기에 줄을 잘 잡아 출세해 보려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꼬여 든다. 그것이 그 복합체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는 혈연이나 지연, 그리고 학연과 같은 연결망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러한 봉건적 연결망으로는 새로운 네트워크 시대의 개방성과 창의성을 구현할 수 없다. 자유로움도 없다. 이제는 좋든 싫든 새로운 네트워크 문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에 겸허하게 몸과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베일에 덮인 구조의 허구성

발전된 사회에는 내밀한 영역보다는, 공공 영역이 광범위하게 성립되어 있다. 그 영역은 단지 추상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이익을 일관된 안목으로 볼 수 있는, 명증화된 사회공간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변화를 위해서도 혈연 지연 학연의 관성에 과감히 도전해야 한다. 극히 사적인, 포장뒤에 가린, 그리고 베일에 덮인 그 구조의 허구성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자기 지적인 판단에 따라 사는 것이 자기 정체성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런 면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주책없이 동류에 휩쓸리는 데에 어찌 자기 정체성인들 설 수 있겠는가. 자기 정체성은 차이의 다양성을 추구함으로써 가능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얘기보다는, 무지막지하고 정서에 야합하는 얘기에 솔깃하는 자세부터 고쳐야 한다. 그래서 오는 6월5일에 있을 선거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기준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는 새로운 유권자 상(像)을 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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