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협상 재개를 위한 채권단과의 합의로 그리스가 큰 고비를 넘겼지만 사태 해결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정상들과 마라톤 회의 끝에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자국 내에서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그리스 국민이 국민투표에서 거부한 채권단 협상안보다 훨씬 강도 높은 수준의 합의안이 나온 것에 집권당 내부에서도 비난이 일고 있다.

860억 유로(약 107조원)에 이르는 구제금융을 받기까지 개혁법안 입법, 유럽중앙은행(ECB)의 긴급유동성지원(ELA) 증액, 채무 상환 등 일정도 숨 가쁘게 돌아갈 전망이다.

구제금융 합의로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우려가 사그라져 금융시장은 일단 안도했지만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그렉시트 가능성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치프라스 총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로존 정상들과 장장 17시간에 이르는 협상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당장 자국 내 반발을 마주해야 했다.

구제금융 합의가 이뤄진 13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 의회 앞에서는 소규모 좌파 정당인 안타르시아 주도로 합의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의 깃발을 불태우며 긴축 반대를 공약으로 당선된 시리자가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유로그룹은 그리스 정부와 신뢰를 재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그리스의 개혁안에서 한층 강도가 높은 합의문을 내놨고 그리스는 이를 수용했다.

협상 타결로 그리스는 일단 전면적인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빠지는 상황은 모면했지만 국민의 삶은 더 팍팍하게 됐다.

국민투표 후 축제분위기에 젖었던 그리스인들은 투표에서 자신들이 거부한 채권단 협상안보다 가혹한 개혁안을 마주하고 허탈과 분노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다.

집권당 내부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리자 내 강경파인 '좌파연대'(Left Platform)는 합의안에 대해 "그리스에 대한 모욕"이라고 성토했다.

연립정부 파트너인 독립그리스인당(ANEL)도 이번 합의를 '독일의 쿠데타'라 칭하며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채권단과의 신뢰 구축 전략에 따라 사임한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전 재무장관도 구제금융 협상안을 '신(新) 베르사유 조약'에 비유하면서 "굴욕의 정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베르사유 조약은 1919년 6월 당시 독일제국과 연합국이 맺은 제1차 세계대전 평화협정이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해외 식민지와 유럽 내 10% 이상의 영토와 인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피해국에 대해 엄청난 배상금을 부과받았다.

당시 독일에 일방적이고 굴욕적이었던 베르사유 조약을 이제는 그리스가 '굴욕 당사자' 입장에서 맺었다는 것을 빗댔다.

그리스가 구제금융 자금을 지원받기까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일단 15일까지 연금과 부가가치세, 노동관계, 민영화 등 4대 부문에서 합의된 개혁안이 그리스 의회를 통과해야 한다.

협상안에 거부감이 많지만 집권당 내 반대세력이 이탈한다고 해도 야당의 협조를 얻으면 법안 처리는 가능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치프라스 총리가 구제금융 합의와 관련해 제1야당인 신민당 등 주요 야당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집권당 내 이탈표가 생기더라도 개혁안이 의회에서 부결될 위험은 없다고 내다봤다.

입법 작업이 끝나면 ECB가 16일 그리스 은행에 대한 ELA 한도 증액 여부 등을 결정한다. ECB는 지난달 26일 ELA 한도를 890억 유로 가량(약 111조원)으로 올린 이후 동결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

17일에는 독일을 비롯해 네덜란드, 핀란드, 오스트리아, 에스토니아, 슬로바키아 의회에서 유로존 정상회의 합의 내용을 수용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20일은 그리스가 ECB에 총 35억 유로를 갚아야 하는 만기일이다. 시장에서는 구제금융 협상 결렬 시 그렉시트 기로가 결정되는 시점을 20일로 꼽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리스가 유동성 공급을 받아 상환이 이뤄지면 합의안에 따라 22일까지 민사소송법을 도입하고 유럽연합(EU)의 은행 회생 및 정리지침(BRRD) 관련 법안을 입법하게 된다.

그리스가 입법과 채무 상환을 하는 사이에도 채권단과의 구제금융 협상은 숨 가쁘게 이뤄질 전망이다.

그리스와 채권단의 합의를 금융시장은 반겼다. 변동성을 크게 할 그렉시트 우려가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간밤 유럽증시는 강세로 마감했다.

영국 런던의 FTSE100지수는 0.97% 올랐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DAX30지수와 프랑스 파리의 CAC40지수도 각각 1.94%, 1.49% 상승했다.

미국 뉴욕증시의 주요 지수도 그리스 호재 덕분에 큰 폭으로 올랐다.

다우존스 30산업평균지수는 전날보다 1.2% 올랐고 S&P500지수는 1.1%,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지수는 1.5% 상승했다.

그리스의 10년만기 국채금리는 147bp(1bp=0.01%포인트)나 하락했다. 국채금리가 오르면 가격은 상승한다.

그리스 위기의 남유럽 전염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의 10년물 국채금리도 모두 내렸다.

이날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주요국 증시로 상승세로 출발했다. 한국 코스피는 약보합 상태를 나타냈다.

금융시장은 안도했지만 그렉시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씨티그룹은 "협상안의 강력한 조건을 봤을 때 그렉시트 가능성이 상당하다"며 "구제금융 프로그램이 정한 경제 회복과 재정 적자 축소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위험이 커져 유로존 잔류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캐피털이코노믹스의 줄리안 제솝 이코노미스트도 "망가진 그리스 경제 상황과 재정 시스템을 고려할 때 그리스가 유로존 밖에 있는 것이 더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며 "도입될 새로운 화폐 가치 하락이 적어도 긴축에서 해방된 그리스 경제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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