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화정 동반 부진

요즘 주요 공중파 방송국의 사극 제작자들은 체면이 말이 아니다.

기록에 충실한 정통사극도,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한 팩션사극도 작황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KBS 1TV 정통사극 '징비록'과 MBC TV 팩션사극 '화정'이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두 드라마 모두 올해 상반기 최고 화제작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더 쓰라린 결과다. 

올해 2월 시작한 KBS 1TV 주말드라마 '징비록'은 지난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낳았던 '정도전'을 잇는 대하사극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드라마 제작발표회에는 이례적으로 조대현 KBS 사장까지 참석해 이 작품에 대한 KBS 안팎의 기대를 보여줬다.

2개월 뒤 방영된 MBC TV 월화드라마 '화정'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진용을 짰다. 할리우드 영화에 빗대어 '사극판 어벤져스'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드라마는 케이블채널 tvN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로 절정 인기를 누리던 차승원을 남자 주인공 광해로 기용했다.

박영규와 이성민, 조성하, 김여진, 정웅인, 김창완 등 각기 다른 색깔의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중견 배우들이 그 주위를 든든히 에워쌌다.

'징비록'과 '화정' 모두 1회 시청률이 10.5%(닐슨코리아·전국 기준)를 기록하는 등 출발도 순조로웠다.

그러나 두 드라마는 갈수록 상승세를 타기보다는 회마다 들쭉날쭉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지부진한 상태다. 인기의 또 다른 척도인 온라인 화제성도 경쟁작만 못했다.

'징비록'과 '화정' 부진을 두고서는 TV와 스크린에서 숱하게 다뤄진 조선 제14대 왕 선조(1567∼1608·이하 재위 기준)-제15대 광해군(1608~1623)-제16대 인조(1623~1649) 시대를 선택한 탓이라는 분석이 가장 먼저 나온다.

이때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정치·사회·경제·문화적으로 격변했던 시기다. 

두 작품의 흥행 실패는 이러한 난세에서 유독 지리멸렬한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는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이기도 하다.

대다수 TV 사극은 영웅형 주인공이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거나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왔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7년을 겪은 재상 류성룡이 다시는 무참한 전쟁을 겪지 않도록 잘못을 뼈아프게 반성하며 쓴 기록을 토대로 한 드라마다.

그 때문에 영웅 이순신의 잇단 승전보를 전하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던 KBS 1TV '불멸의 이순신'(2004~2005)과 달리 기본적으로 그늘진 역사를 조명할 수밖에 없다.

극을 이끌어가는 두 축 중 하나인 선조(김태우 분)는 무능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끝을 알 수 없는 치졸함으로 시청자들을 매번 기함하게 한다. '발암 선조'로까지 불릴 정도다.

전투에 나선 지휘관은 도망치기에 바쁘며, 조정 신료들은 당파 싸움을 벌이며 양반들은 몸을 사리는 세태는 매번 시청자들의 한숨을 자아낸다. 

김상중이 분한 류성룡도 영웅형 주인공을 맡기에는 애초에 평면적인 캐릭터였다. 충심으로 무장한 점잖은 선비지만 난세를 헤쳐나가는 데 있어 별반 임팩트는 없다. 

김상중 연기가 지나치게 밋밋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전작 케이블채널 OCN '나쁜 녀석들'의 오구탁 반장을 맡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절반만 맞는 지적이다. 

비슷한 시기 구중궁궐을 포착한 '화정'도 암울한 이야기 속에서 구심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극의 주인공은 선조 적통 공주로,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수차례 겪은 끝에 여섯 왕과 같은 시대를 살며 83세까지 장수한 정명(이연희)이다.

지난 14일 방영된 28회까지는 일본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정명 공주가 동생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 광해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모종의 결단을 내리는 모습이 방영됐다.

정명의 이야기는 충분히 극적이다.

하지만, 이연희는 공주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화하고, 50부작 드라마의 기승전결을 책임질 역량이 부족함을 드러냈다.

특히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데 있어 한결같은 그의 표정 연기는 방영 전부터 거셌던 안티 여론을 잠재우기엔 미흡했다.

남자주인공을 맡은 차승원은 껑충한 키에 곤룡포를 걸친 채 때로는 처연하고, 때로는 이글거리는 눈빛 연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나마 극을 지탱해왔던 차승원이 이제 곧 퇴장하면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 역의 김재원이 이연희와 함께 극을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강파른 얼굴로 등장한 김재원의 능양군 캐릭터 플레이는 아직 어색한 느낌이 강하다는 평가다. 시청률도 능양군이 등장한 이후부터 점점 하락세를 보이던 끝에 8.8%까지 내려앉았다. 

작가의 돌연 교체와 메인 PD 하차 등 크고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도 '징비록'과 '화정'이 순항하지 못했던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19일 현재 '징비록'은 종영까지 5회 남겨뒀으며, 같은 50부작인 '화정'은 9월 29일 종영할 예정이다.

두 작품 모두 이변이 없는 한 범작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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