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을 비하하는 말들이 많다. 우리의 한심한 정치 행태가 그것을 부르고 있다. 어제 한 말을 오늘 식언하고, 오늘 한 말을 내일이면 잊어버리는 그들에게 신뢰는 사치다.

조물주가 정치인의 머리에 뇌를 집어넣는 것을 깜박 잊어버렸다는 말은 우스개 소리로 듣는다 하더라도, 각계에서 명민하다는 말을 듣던 사람들도 정치판에만 뛰어들면 주체할 수 없는 싸움닭이 되거나 어리석은 바보가 된다. 왜 그런가.

일을 저질러 놓고 아니다싶으니 고개를 깊숙이 숙여 잘못을 위장한다. 90도 각도의 절은 어디서 배웠는가. 진심이 담겨 있다면 가벼운 목례인들 어떤가.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마는가.

순발력 하나는 대단하다. 국민이 ‘아니다’하면 서둘러 잘못을 비는 것을 어찌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웅장한 이론은 고사하고, 며칠 앞을 내다 볼 정치적 안목이 그리도 빈곤했던가.

시장 상인들의 손을 잡고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서 ‘진심’은 보이지 않는다. 이건 또 왜 그런가. 비뚤어진 눈에는 모든 것이 비뚤어지게 보이는가.

 유치원생들도 마다 할, 똑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국민의 시신경을 자극한다. 옷이야 아무 것을 입은들 어떠한가. 막말로 누더기를 걸친들 어떤가.

 솥에 불을 떼기도 전에 밥그릇 싸움부터 한다. 탐욕, 권력에의 의지와 같은 자연적 충동은 이성(理性)에 의해 완벽하게 제어되거나 승화될 수 없다는 정치 철학을 그들은 몸소 실천하는가.

 

정치는 권력과 양심의 영역

그러나 나는 믿는다. 아니, 믿고자 한다. 인간의 본성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질 면에서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정치판도 깨끗해지지 않겠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정치는 권력과 양심이 만나는 영역이다. 인간 생활의 강제적 요인과 윤리적인 요인이 상호 침투하여 잠정적이고 불안정하지만, 타협을 이루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믿어야 한다. 경쟁하는 정치세력들은 서로 간의 차이점을 민주적 방법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토론의 마당을 사용할 것이며, 그 차이는 도덕적 설득과 합리적 조정에 의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갈등이 전혀 없는 사회는 오히려 사회적 지성과 도덕적 활력의 부재를 초래한다. 모든 충동을 이성의 통제하에 둘 수만 있다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벅찬 감정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이성이 비록 편견에 사로잡혀 부분적인 입장에 굴복하는 일이 간혹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이성은 온갖 주장과 요구를 분석하고 판가름하는 일을 맡는다.

 

한 표는 이성과 양심의 표현

이것마저 나의 환상인가. 나의 어리석음인가. 그러나 한 국가내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태도들의 차이는 선의지와 지성에 의해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조화될 수 있다.

환상은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한에서만 지속되는가. 이성과 양심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정치적 평화를 이룰 수 있음을 나는 변함없이 믿고자 한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의 근사치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의 환상은 믿는 구석이 있다. 바로 한 표(票)다. 그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이성과 양심의 표현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인간의 의지와 책임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그 흐름을 한 표가 좌우한다. 각성한 사람이 많으면 그것은 청류의 흐름이 되고, 돈이나 제1차적 집단의 감정에 굴복한 사람이 많으면 탁류의 흐름이 된다.

우리가 선택할 사람은 ‘의식 수준이 높은 사람’이다. 의식 수준은 시대와 장소가 요구하는 사명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행동의 양으로 평가된다.
정말 한 표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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