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와 행복의 시대, 놀이터가 달라져야 한다] <下> 어떻게

1호부터 129호까지 똑같은 제주시 어린이공원
숨고 매달리고 무엇으로 호기심 자극할까 과제

▲ 1986년 설치된 제주시 삼도동 제1호 어린이공원. 전문가들은 놀이기구는 화려한 색과 디자인으로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다양한 놀이욕구를 채울 수 있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문정임 기자
▲ 제주시 어린이공원 129곳 중 가장 최근에 설치된 노형동 제129호 어린이공원. 제주시의 어린이공원들은 대개 이렇게 생겼다. 문정임 기자

제주시에는 129개의 어린이공원이 있다. 위치도, 준공 시기도 다르지만 설계는 거의 비슷하다. 1986년 조성된 삼도1동 제1호 어린이공원에도, 2015년 조성된 노형동 제129호 어린이공원에도 미끄럼틀(복합 놀이시설)과 그네가 전부다. 놀이기구 아래 고무매트가 깔려 있고, 주변에 공용의자가 있으며, 그 외 놀이시설이 한두 개 더 있는 정도다.

제주시내 129개 어린이공원은 모두 ‘지시적 놀이터’라는 점도 비슷하다. 각 놀이터들은 설치된 놀이기구를 안전규칙에 맞춰 이용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미끄럼틀 위에서는 장난을 치면 안 되고, 계단으로 올라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라고 지시한다.

아이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호기심을 자극받을 만한 다른 도구는 없다. 놀다 목이 말랐을 때 마실 수돗물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 이 같은 ‘진부한’ 놀이터의 설계는 제주시에 1호 어린이공원이 설치된 1986년 이후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단조롭고 몇 가지 시설 위주로 설치된 놀이터를 ‘공문형 놀이터’(준공을 위한) 혹은 ‘지시적 놀이터’(아이들의 동선을 통제하는)라고 비판한다.

반면 타 지역에서는 ‘창의’와 ‘행복’이 아이들 삶에 중요한 철학적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놀이’에 더불어 ‘놀이터’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전국 시도교육감들이 지난해 ‘어린이 놀이헌장’을 발표했는가 하면, 지자체 가운데 순천시가 올 봄 ‘기적의 놀이터’ 1호를 개장했다.

편해문, 귄터 벨치히 등 국내‧외 민간 놀이(터)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만든 순천시 제1호 기적의 놀이터 ‘엉뚱발뚱’에는 흐르는 물과 다양한 입자의 모래, 경사로, 거대한 나무, 넓고 큰 돌이 있다.

아이들의 상상력에 찬물을 붓지 않기 위해 모래는 1m이상 쏟았고, 각각의 놀이 도구들은 아이들의 동선을 고려해 배치했다. 해가 지면 고양이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모래 위에 천막을 덮고 물이 썩지 않도록 흘러가게 만드는 등 위생적인 배려는 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위험은 아이들이 감수하도록 설계했다.

기적의 놀이터를 만들면서 순천시가 세운 기준은 ▲놀이기구를 최소화할 것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놀이요소를 곳곳에 디자인으로서 숨겨놓을 것 ▲위험요인은 제거하되 아이들이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건강한 리스크는 남겨둘 것 등이었다. 순천시는 아이들이 즐거운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전문가 외에 부지 주변 율산초등학교 학생 1061명의 의견을 듣고 공사 후 아이들의 감수를 받기도 했다.

▲ 순천시 제1호 '기적의 놀이터' 에서 진흙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순천시 제공
▲ 순천시 제1호 '기적의 놀이터' 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제주매일DB

전문가들은 나쁜 놀이터로서 훈련장 같은 놀이터, 조경 장식이 많은 놀이터, 휴식 공간으로만 이용되는 놀이터를 꼽는다. 여기에 비좁은 공간, 너무 적은 선택가능성, 단조로움, 삭막하며 지나치게 안전하고 지나치게 막혀있고 지나치게 규제가 많은 놀이터도 더불어 포함된다.

반면 좋은 놀이터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고 조언한다.

지난 5월 순천시에서 열린 ‘어린이놀이터 국제심포지엄’에서 귄터벨치히, 아마노 히데아키, 수전 지 솔로몬 등의 전문가들은 “놀이기구는 화려한 색과 디자인으로 어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다양한 놀이욕구를 채울 수 있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매달릴 곳, 숨을 곳, 탈 것 등이 필요하며 물, 돌, 나무, 모래 등 자연물이 좋은 도구가 된다”고 강조했다.

조충훈 순천시장이 ‘표도 안 되는’ 아이들의 놀이터에 주목한 것은 삶의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공장을 많이 유치하는 사람이 유능한 시장이었지만 이제는 삶, 행복, 자연이 중요해졌다. 순천시의 기적의 놀이터는 우리 주변의 놀이터들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열어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순천시는 4억 원을 들여 2년간 고민해 만든 1호 기적의 놀이터를 2020년까지 10곳으로 늘려 나간다는 계획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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