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석 박사의 제주지질 이야기<23>수월봉

▲ 수월봉 응회에서 관찰되는 탄낭구조(bomb sag·사진 위쪽)와 수월봉 응회암의 퇴적구조.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지도를 보면 수월봉을 고산(高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바닷가에서 70여 미터의 높이로 낮은 해안 언덕인데도 불구하고 ‘높은 산’의 의미로 부르고 있다. 현재 고산리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가 바로 이 수월봉이다. 수월봉은 제주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지질 명소(geosites) 중의 한 곳이다. 지질 명소로 선택된 이유는 ‘엉알’ 해안 단애의 화산쇄설층에서 관찰할 수 있는 아름다운 퇴적구조 때문이다. 아마 전세계 수성화산 중에서 가장 멋진 응회암의 퇴적구조이다.

화산체가 형성된 이후 수만년에 걸쳐 변동하는 해수면과 그에 따른 화산체의 침식, 강한 바닷바람은 아직 채 굳어지지 않은 화산재층을 아름답게 조각해 놓았다. 그 언덕 위에 신석기 초기의 고산리 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부터 약 1만년 전, 이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수월봉 지질공원의 주제는 바로 수성화산체인 수월봉 위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당시 고산리 사람들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월봉의 화산활동, 수성화산 응회암에 새겨진 아름다운 퇴적구조

수월봉은 지하 깊은 곳의 지각(地殼)에서 상승하는 마그마가 물과 만나서 격렬한 폭발로 만들어진 수성화산(水性火山)으로 응회환(tuff ring)이다.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당산봉은 같은 성질의 수성화산이지만 응회구(tuff cone)로 서로 구분된다. 수월봉 ‘화성쇄설층’이라는 말은 주로 화산재를 비롯한 화산성 물질들이 부스러기 형태로 층층이 쌓여 있다는 뜻이다. 화산재는 물론 화산 모래, 현무암이 부셔진 화산 자갈과 탄낭구조를 이루는 바위 덩어리의 화산탄까지 모두 섞여 있다. 쇄설층이라는 용어가 일본식 한자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수성화산활동으로 분출된 물질은 다양한 크기를 갖고 있지만 주로 화산재 크기의 물질로 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은 화산재층을 통틀어 가리키는 응회암(tuff)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수월봉과 같은 화산쇄설층을 응회암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물질들은 수성화산 분화구에서 강력한 힘으로 공중으로 뿜어낸다. 바람과 함께 분화구 사면을 먼지 구름 형태로 먼거리까지 흘러가서 쌓인다. 화쇄난류(火碎亂流, pyroclastic surge)라고 부른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백여 미터 높이의 화산체가 만들어진다. 수월봉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응회암의 두께는 77 미터이다. 당시 분화구는 침식되어 사라지고 없다. 추정컨대 수월봉 분화구는 화산탄이 집중 분포되어 있는 수월봉 팔각정 해안 단면의 높이를 고려할 때 수월봉 정상 바로 앞 바닷속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월봉은 분화구가 없는 수성화산체인 셈이다. 하지만 해안선 절벽을 따라 수직 단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다양한 퇴적구조는 수월봉이 어떻게 분출했는지에 대한 지질학적 증거들을 보여준다. 예로 분화구 중심부에서 꼬리 부분까지 화쇄난류가 퇴적된 모습을 퇴적물 입자의 크기나 사층리와 같은 퇴적구조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 수월봉 응회암의 노두, 한지머리 해안.

수월봉에는 매우 큰 현무암의 바위 덩어리들이 화산탄의 형태로 화산재층 속에 박혀있는 모습의 탄낭구조(bomb sag)가 잘 발달되어 있다. 분화구 중심부에 해당하는 수월봉 정상 아래, 엉알길 진입로 부근에서 잘 관찰된다. 탄낭을 만든 암석의 크기와 숫자를 보면 당시 화산활동의 에너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탄낭의 암석은 화산탄으로서 분화구 속에서 공중으로 쏘아 올려진 것이기에 분화구 주변에만 모여있다. 수월봉 해안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암석이 지하에서 상승하는 화산의 힘으로 부셔져서 방출된 것이다. 이 탄낭에 들어있는 암석은 광해악 현무암으로 약 21만년 전에 형성된 용암류에 해당한다.

수월봉의 화산분출 시기에 관한 견해

수월봉의 분출시기를 알아내기 위하여 응회암에 포함되어 있는 석영 입자에 대한 광여기 발광법(OSL)으로 측정된 지질연대는 18,000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지질학회에 보고된 이 연대치를 처음 접하는 순간, 하필이면 마지막 빙하기 중에서도 가장 해수면이 낮았을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다소 실망스러웠다. 솔직히 신뢰성에 의심이 갔던게 사실이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화산체인 오름(분석구, 수성화산, 용암돔)들은 대부분이 수만년 전에 생성된 것들이다.

이 시기는 전지구적으로 마지막 빙하기에 해당된다. 빙하의 발달은 해수면 하강과 관련이 있다.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하강하고 반대로 간빙기가 되면 북반구의 두꺼운 얼음층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게 된다. 지금은 간빙기로 해수면이 가장 상승된 시기에 해당된다. 우리가 제주도의 고지리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지금보다 해수면이 하강한 시기인 빙하기 때의 이야기다. 당시 빙하가 발달하여 해수면이 하강하면 얕은 바다는 육상으로 드러나게 되며 육지가 서로 연결되어 넓어지게 된다. 마지막 빙하기에는 빙하의 발달이 가장 활발하여 우리나라 주변에서 해수면이 최대 150 미터까지 하강했다고 한다. 현재 한반도와 중국 사이의 바다인 황해의 평균 해수면이 약 50 미터이므로, 당시에는 해발 100미터 높이의 육지가 드러났다는 단순 계산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 퇴적물이 쌓이는 비율을 계산에 넣어야 하지만 말이다.

우연하게도 빙하가 가장 발달한 시기는 약 2만년에서 1만 5000년 전이다. 이중에서도 1만 8000년 전에 가장 해수면이 하강했다. 당시 해수면은 일본 오키나와 가까이 까지 후퇴해 있었고, 중국과 제주도는 물론 이어도(socotra rock)도 육지로 드러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수월봉이 형성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육상으로 드러난 육지에서도 수성화산은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제주도에 분포되어 있는 수성화산체인 성산일출봉이나 송악산의 사례에서 보듯 보통은 해안선 주변에서 수성화산활동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수월봉은 2만년 이전이거나, 아니면 해수면이 거의 현재의 상태로 복원된 1만년 전과 가까운 시기에 분출해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수월봉 언덕 위에 고산리 유적이 존재한다. 약 1만년 전의 유적이다. 고고학은 시간 개념이 지질학과는 달리 매우 정밀하기 때문에 고고학적 층서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즉, 1만년 전에 형성된 고산리 유적의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질학적 시간 개념과의 융합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질학적으로 밝혀진 절대연대는 변할 가능성이 많다. 제주도에서 이미 밝혀진 수성화산의 활동양상을 고려할 때 수월봉은 좀 더 젊어져야 한다. 즉, 화산분화의 시기가 해수면이 상당 부분 복원된 1만년 전과 가까운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1만 몇천년 전에 수월봉은 수성화산으로 폭발하고, 뒤이어서 그 언덕에 신석기 초창기 고산리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을 것이다. 수월봉 지질공원에서 화산지질학적 해석을 고산리 유적의 고고학과 접목시킬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고문헌인 이원진의 탐라지(1653년)를 보면, 당시 고산리 지역에는 박은곶(所近藪)이라는 숲이 한라산에서부터 당산봉 차귀당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구내도 꽤 큰 규모의 하천이었다. 지금 수월봉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고산리 유적은 강이 흐르고 곶자왈 숲이 우거져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천혜의 환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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