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우티나 (3)

2~3세기경 로마인들이 튀니지 변방에 재건한 고대 도시 ‘우티나’를 돌아보는 일은 경이, 그 자체다. 로마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1만5000명 규모의 원형경기장과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주피터 신전, 그리고 박물관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만난 귀족들의 빌라 집터까지. 시간을 거슬러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서 있는 듯하다.

▲ 2~3세기 귀족들이 살았던 빌라의 터에서 발견된 거실 모자이크 바닥. 이 소중한 유산이 외부에 그대로 노출돼 있어 안타깝다.

▲모자이크 거실바닥엔 당시의 삶이

이 곳은 2~3세기 귀족들이 살았던 호화스런 집터다.

고대 로마의 주거유형은 개인주택인 도무스(Domus), 별장 또는 정원 주택인 빌라(Villa), 평민과 노예들이 사는 공동집합주택인 인슐라(Insulla)로 구분되는데 여기에는 모두 빌라만 있다고 한다. 비잔틴 시대 이전의 주택과 비잔틴 이후의 건물 양식들이 혼합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장 잘 보존 되고 가장 아름다운 빌라는 당시 로마의 귀족 '라베리(Laberii)'가 살았던 집이다. 2세기에 지은 저택으로 면적은 1600㎡평방미터(530여평), 정원이 있고 포티코(portico)양식으로 지어졌다.

거실 바닥에는 당시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모자이크가 있다. 포도나무에 둘러 싸여 그 속에서 포도주를 빗고 있는 모자이크, 사냥을 하는 모자이크, 농민들이 노동을 하는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 등이 선명하게 거실바닥에 박혀있다.

▲ 2~3세기의 수도교. 당시 사람들은 50km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왔다.

▲술에 관대한 이슬람국가

나는 포도주를 빚고 있는 모양의 모자이크를 보면서 이슬람 국가인 튀니지가 술에 대해서는 관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와인을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말한다. 이슬람 경전 '코란'에 '취한 상태'를 경계하라는 구절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그래서 보수적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 사우디아라비아나 시아파 국가 이란은 주류 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문헌상 와인의 역사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 소아시아 지방에서 시작되어 페니키아인에 의해 로마, 그리스, 이집트 등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튀니지에는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에 살던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하여 세운 카르타고 왕국이 있었다.

튀니지 와인의 역사를 보면, 기원전 2~3세기의 카르타고의 마공(Magon)이라는 농학자가 와인을 만드는 법에 대한 책을 저술했는데 술을 빚는 기법이 아주 뛰어나 로마도 그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튀니지는 기원전부터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술에 있어서 아주 관대하다. 다른 아랍국가와 달리 대형슈퍼마켓에 가면 웬만한 술은 쉽게 살 수 있다. 튀니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공(magon)이라는 와인도 생산하고, 셀티아라는 맥주도 생산한다. 어둠이 내릴 때 쯤 되면 도심 번화가에 있는 술집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청춘남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 홍등가임을 알리는 남성 성기 문양이 벽에 조각되어 있다.

▲공동목욕탕 아래는 홍등가

모자이크를 보며 집터를 지나 아래로 더 내려오니 돌산이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돌산이 아니라 무너진 건물 기둥이 풍화된 것이다.

기둥 둘레는 어른 3~5명이 양팔을 잡아야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건물 기둥 하나가 이 정도라면 건물 전체는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건물 상부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지하로 내려가니. 맙소사. 언젠가 이탈리아 고대 로마 도시인 봄베이에 갔을 때 보도에 홍등가 방향을 알리는 남성성기 조각을 본적이 있다. 그런데 똑같은 조각이 여기에도 지하 입구 벽에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폐허가 된 상부는 공동목욕탕이고 지하는 홍등가였다.

로마인들은 이 목욕탕을 위해 50km나 떨어져 있는 ‘워터 템플’에서부터 수도교를 만들어 물을 끌어왔다. 지하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많은 방들이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부서지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로마인들의 건축술에 경탄할 수밖에 없다.

구역을 나누는 출입문은 모두 아치형 석조로 만들어져 있는데 석조물 모두가 예술이다. 로마가 목욕문화로 사치를 부리다가 멸망했다는 말이 나옴직도 하다. 그러나 로마는 목욕 등의 사치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다. 로마의 목욕문화에 대해서는 튀니지 시골 마을 ‘자구완’에 있는 ‘워터 템플’ 여행기를 연재할 때 다시 언급할 생각이다.

▲ 공동목욕탕에 있는 창. 이 창을 통해 양을 치는 어머니와 갓난 아이를 만났다.

▲어딜가도 한국 열풍

지하에서 빠져 나오자 양을 치는 어머니와 갓난 아이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 마침 갖고 있던 막대사탕을 주었더니 아주 좋아한다. 이후부터는 나는 현지인들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여행을 할 때마다 과자나 사탕을 가지고 다닌다. 어린이들에게 주기 위해서다. 튀니지의 유적지에는 울타리가 없다. 그래서 광활한 초원에 있는 유적지 안에는 목동과 양 떼가 한가로이 다니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거의 매표소까지 다 왔는데 멀리서 10여명이 어린이들이 나에게 달려오면서 혹시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안녕하세요!” 하며 난리가 났다. 내가 “너희들은 어디서 왔니?” 했더니 ‘베자’에서 왔다고들 한다. 베자는 아주 북쪽에 있는 도시로 이곳에서 버스로 3시간이 더 걸리는 먼 곳이다. 아이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한국 인사말 몇 가지를 가르쳐 주니 아주 좋아한다.

이제 나도 이 곳 우티나 여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기 위해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데 택시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마을까지 걸어서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달려가서 마을까지만 태워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아까 유적지에서 나를 봤다고 하면서 어서 타라고 한다. 건네주는 명함을 보니 시디부사이드에 있는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미국인 부부 교수다. 앞으로 연재할 예정이지만 시디부사이드는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 못지않게 푸른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는 동화같이 환상적인 곳이다.

그 분들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한다. 자신의 제자 중에도 한국인 있다면서 나에게 이름을 말해줬지만 잊어버렸다. 튀니스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밥알리우와’ 르와지터미널까지 태워 주겠다고 한다. 이래서 여행에서의 만남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할 때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한 장거리 히치하이크는 위험하다. 가능하면 히치하이크는 안하는 것이 좋다.

유적지 관리인 말에 의하면 지금 우티나는 튀니스의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이탈리아 칼리아리의 대학 사이의 협력 계약을 맺어서 지금 반쯤 발굴된 상태다.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막대한 비용 때문에 발굴은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정확하지 않지만 이곳에 도시가 처음 형성된 것은 기원전 3세기라 하며 지금의 로마 유적은 2~3세기 유적이라 한다. 기원전 3세기면 우리나라는 철기문화가 막 시작되는 초기 삼국시대 단곋다.

이 곳은 아직 유적이 발굴 중이라 관광객의 발길은 닿지 않는다. 우티나의 로마유적지는 튀니지에 숨겨진 보석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고병률 제주도작은도서관협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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