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등 ‘비선 실세’ 국정농단
나라 전체가 소용돌이 빠져
朴 대통령 사과에도 民心 싸늘

‘국민적 자존심’ 무너진 게 주원인
촛불시위 계기 탄핵 등 대두
‘내 탓’ 인정하고 진정성 보여줘야

오늘과 같은 사태를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교수신문이 지난해 선정한 사자성어는 바로 ‘혼용무도(昏庸無道)’였다.

‘혼용’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지칭하는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율곡 이이가 논한 ‘임금의 도리(君道)’를 보면, 혼군은 ‘정치를 잘하려는 뜻은 있지만 총명하지 못해 현명한 신하 대신 간사 무능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을 기용해서 패망하는 군주’다. 또 용군은 ‘나약하고 과단성이 없어 구태만 되풀이하다가 나라를 망치는 지도자’를 말했다.

‘무도’ 역시 세상이 어지러워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논어의 천하무도(天下無道)에서 유래했다. 이를 종합하면 혼용무도는 ‘나라 상황이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는 뜻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혼용무도’ 그 자체다. 최순실 등 이른바 ‘비선 실세’들의 국정 농단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감에 빠졌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일 두 번째로 국민 앞에 용서(容恕)를 구했다. 10월 25일 첫 대국민 사과를 한 뒤 열흘 만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조사에 성실히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68년 대한민국 헌정(憲政)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이어 박 대통령은 “저의 큰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어제 최순실씨가 중대한 범죄혐의로 구속됐고,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이 체포돼 조사를 받는 등 검찰 특별수사본부에서 철저히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지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라며 “이 모든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로 일어난 일”이라고 거듭 사과했다.

대통령이 두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대국민 사과 다음날인 5일 밤 서울 광화문광장을 밝힌 촛불 20만개의 ‘탄핵 시위’는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이 같은 싸늘한 민심은 ‘무너져 내린 국민적 자존심’에 기인한다. 차라리 대통령의 실정(失政)이었다면 국민들의 심정이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을 터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최순실씨 같은 비선(秘線)에 어처구니가 없게 ‘놀아났다는 것’이, 국민들로 하여금 분노와 개탄,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지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로선 대통령이 어떤 말이나 조치를 취해도 국민들에게 먹혀들 것 같지 않다. 때문에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지난 주말 촛불 시위를 계기로 야권이 강경 자세로 돌아선 것도 큰 부담이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당초 대통령의 ‘2선 후퇴’ 정도에서 정국을 수습하는 것을 고려한 듯 보였으나 성난 민심을 확인하고는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참에 탄핵이나 대통령의 하야(下野) 등 ‘루비콘강’까지 건널 태세다.

코너에 몰린 박 대통령에게서도 마지막 오기가 감지된다.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이 모든 걸 다 내려놓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병준 총리’를 끝내 고수하는 것을 보면 책임 총리제의 공식화나 여야 영수회담 등을 통해 흐트러진 국정 수습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진 정국 주도권을 내려놓을 뜻이 없다는 방증이다.

강(强)대 강(强)이 서로 부딪히면 부러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다. 따라서 원인이나 상황이 어떻든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권이 당리당략을 떠나 최우선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통해 “이 모든 사태가 저의 잘못이고 불찰”이라고 말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오기가 아니라, 그래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해 왔다는 진정성(眞正性)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탓’을 인정할 때 문제의 실마리도 풀린다. 그것은 국민과 나라와 역사에 대한 마지막 도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어제는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다는 입동(立冬)이었다. ‘혼용무도’의 암담한 현실 때문일까. 올해 대한민국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추워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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