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선종 ‘백성에 밝힌 自責’
아녀자 청탁·아첨꾼 득세 등
900년 후 現 정권서 그대로 재연

“촛불 민심은 朴 대통령 퇴진”
대한민국 이끌 자격·신뢰 잃어
더 지체 말고 ‘憂國결단’ 내려야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은 중국 한나라의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가 체계화한 이론이다.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절대군주 시절에도 임금(천자)은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그 죄가 정치를 잘못한 자신에게 있다는 조서를 반포했다. 이를 ‘죄기조(罪己詔)’라고 한다. 이후 재해 등이 생기면 모든 책임을 군주 자신에게 돌려 반성하는 것은 동양 군주사회의 한 전통이 되었다.

‘춘추좌전’에는 ‘우(禹)임금과 탕(湯)임금이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니 나라가 흥성했고, 걸(傑)임금과 주(紂)임금이 모든 것을 남의 죄로 돌리니 나라가 멸망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와 탕은 중국 역사에서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반면에 걸과 주는 폭군(暴君)의 대명사다. ‘내 탓’과 ‘네 탓이요’가 이들의 운명을 확연하게 가른 것이다.

우리 역사에도 ‘죄기조’의 전통이 있다. 고려의 선종(宣宗)은 가뭄이 심하게 들자 백관들을 거느리고 기우제를 지내면서 구체적인 사안까지 거론하며 자책(自責)했다고 한다. ‘정치가 한결같지 못했는가, 백성들 직업이 없지 않았는가. 궁궐이 사치했는가, 아녀자들의 청탁이 성행했는가. 뇌물이 행해졌는가, 아첨꾼들이 득세했는가’ 등이다.

선종의 ‘실정(失政) 공개 사과문’이 발표된 것은 1088년이었다. 기가 막힌 것은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의 ‘반성 내용’이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과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이다. 정치에 기본과 원칙이 실종되고, 국민들은 실업고(失業苦)에 시달리며, 최순실 같은 아녀자들의 청탁이 성행하고, 뇌물이 횡행하는가 하면 아첨꾼들이 득세하는 등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박근혜 정부도 ‘죄기조’인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적이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慘事)’ 때다. 당시 박 대통령은 “이번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습니다”라며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규명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도 제안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진정성이 없었다. ‘국가 개조론(改造論)’도 말 장난에 불과했다. 만약 그때 철저한 반성과 함께 전반적인 국정 운영상황을 점검하고 뻥하게 뚫린 구멍들을 메꿨더라면, 지금과 같은 참극(慘劇)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12일 100만 여개의 촛불이 대한민국의 밤하늘을 뒤덮었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 도처에서 떨쳐 일어난 촛불집회는 큰 충돌 없이 차분하고 평화스럽게 진행됐다. “한국이 샤머니즘에 농락당했다”고 비아냥 대던 외신들도 돋보인 시민의식을 격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속엔 ‘절제됐지만 엄중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촛불민심에 담긴 함의(含意) 또한 단호했다. 한 목소리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退陣)을 요구한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더 이상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못 하겠다’는 뜻이었다.

국민들이 극도의 배신감과 절망을 느낀 것은 다른데 있지 않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력을 최순실이란 일개 아낙네에게 넘겨 사유화(私有化) 하도록 한 대한민국의 현실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도대체 이게 나라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박 대통령의 입지는 더욱 좁아져 막다른 골목으로 내밀렸다. 이제 대통령에게 남은 카드는 하야(下野) 또는 임기 단축 선언, 실질적 ‘2선 후퇴’ 등이 고작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아직껏 불통(不通) 그 자체다. 100만 촛불집회 후에도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를 무거운 마음으로 들었으며, 현 상황의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가 고작이었다.

한심한 것은 집권여당인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망(死亡) 선고가 내려졌는데도 ‘한 지붕 두 가족’으로 갈려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다. 특히 친박(親朴) 지도부는 사퇴는커녕 ‘조기 전당대회’ 운운하며 민심과는 전혀 동떨어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치적인 셈법’에 연연하는 야권 역시 다를 바가 없지만,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책임은 우선적으로 청와대와 집권여당이 져야 한다.

‘촛불 민심(民心)’은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대한민국을 이끌 자격과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박 대통령은 국가 위기를 부추기는 더 이상의 꼼수를 부리지 말고 선량한 국민들을 위해서라도 ‘우국(憂國)의 결단’을 조속히 내리기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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