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서 기도하던 여류시인
中 관광객에 참변 당한지 2개월여
‘주인공 없는 출판기념회’ 열려

사건 발생하자 각종 대책 내놨지만
이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무분별한 탐욕 등 사회不條理 여전

“당신의 등이 나에게 말합니다/ 깨끗이 씻어서 안기고 싶다고/ 모른 척 발길 돌리려다/ 가슴 울려 돌아서서 보면// 길모퉁이 무성한 잡초 속/ 노란 들국화/ 껑충껑충 뛰어오고/ 물기 남아있는 환한 얼굴/ 당신의 젖은 손이 나를 따뜻하게 하지요// 국화향이 나네요/ 노랗게 우러나온 태양도/ 쪽빛바다도 품고 있는 당신에게서//

-‘국화향이 나네요’ 전문

일주일 전인 11월 28일 저녁 7시, 신제주성당 엠마오홀에선 김성현 시집 ‘국화향이 나네요’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은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유가족과 친지들, 문학동료를 비롯해 성당 가족들이 ‘유고시집(遺稿詩集)’ 출간을 축하하며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시인을 기렸다.

성당에선 김성현 시인을 세례명인 루시아 자매로 불렀다. 1955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예순 둘이었다. 그는 공교롭게도 2007년 같은 해에, 조금은 늦깎이로 세례를 받고 또 늦깎이로 시인에 등단했다. 그러기에 양쪽 모두 그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했다.

루시아 자매는 세례 후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했다. 레지오단원 및 프란치스코 재속회원으로 기도생활에 열심히 정진했고, 성서모임 봉사자 등으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시 쓰기도 게을리 하지 않아 120편의 시를 추려 초고본(草稿本)을 만들고는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첫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 얼굴조차 모르는 중국인 관광객에게 참변(9월 17일)을 당하리라곤 그 누구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루시아 자매는 피살 직후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그 다음날 끝내 숨을 거뒀다. 자신이 못다 이룬 꿈들을 이 세상에 남긴 채 생을 마감한 것이다.

9월 21일 신제주성당에서 엄수된 장례식에서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는 강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시아 자매님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하느님과 교회에 봉헌한 예수님의 제자이셨습니다. 마지막엔 성당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 돌아가신 그 12처를 묵상하신 그 순간, 예수님의 운명을 함께 나누고 겪으셨습니다. 저는 루시아 자매가 오늘 ‘이 시대의 순교자(殉敎者)’라고 선언하고 싶습니다.”

이어 강 주교는 물질만능에 물든 우리 사회에 대해 통렬한 일침도 가했다.

“우리는 죄 없고 티 없는 거룩한 영혼의 소유자가 당한 오늘의 이 부조리하고 무자비한 죽음의 탓을, 우리 자신들의 무분별한 탐욕(貪慾)에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루시아 자매의 순교는 환락의 탐닉과 질주를 멈추고 인간의 품격과 존엄에 어울리는 절제 있는 삶을 회복하라는 하늘의 경종(警鐘)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성현 시인의 참혹한 죽음 이후 매스컴은 연일 이를 대서특필했다. 제주자치도와 경찰 등 관계당국도 각종 대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사건 발생 2개월이 훨씬 흐른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 출간된 ‘김성현 유고시집’은 가족들이 고인을 대신해 작업을 마무리해 이 세상에 나왔다. 여기엔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재정지원, 문학평론가인 양영길 선생과 양민숙 시인 등 한수풀문학동인 및 돌과바람 문학동인들의 숨은 노력이 매우 컸다.

고인의 시 스승이자 평론가인 양영길 시인은 시집 해설을 통해 “김성현 시인의 시적 공간에는 삶의 순수성과 진정성이 짙게 배어 있다. 이는 소박한 삶의 이해와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망, 그리고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휴머니즘에의 자각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문학 동료이자 인생의 선후배로 12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던 시인 양민숙은 “어쩌면 오래지 않아 언니를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가끔 어디선가 언니 이름을 발견하고는, 그 모습을 기억하며 따뜻한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게 언니를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일 테니…”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훔쳤다.

시인의 ‘낙엽으로 사는 것’ 제목의 시엔 이런 구절이 있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내 바다에서 올라왔으니/ 나무의 무성한 잎도/ 열매의 많고 적음도 일시적인 것/<중략>// 해를 따라 산등성이 내려가는 길/ 또다시 민들레꽃 피면/ 가을이 그리워질 테지//

고(故) 김성현 시인은 필자에게도 국화꽃 향기 나던 누이 같은 존재였다. 또다시 가을이 오면 루시아 자매님이 그리워질 겁니다.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누리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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