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우티크(Utique)

북아프리카 튀니지에는 유티카(Utica) 또는 우티크(Utique)라고 하는 페니키아인의 세운 또 하나의 해양 도시국가가 있다. 우티크는 히브리어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 페니키아인들이 북아프리카에 세운 도시국가 중 카르타고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편집자주>

▲ 기원전의 도시 우티크의 모습

▲카르타고 다음으로 컸던 페니키아인의 도시
기원전 149년경, 우티카는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로마와 벌인 전쟁(제3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9년~기원전 146년)에서 카르타고를 도와주지 않고 로마 편을 들면서 같은 민족인 카르타고와 싸웠다.

이 전쟁에서 결국 로마가 승리했다. 로마는 전쟁 후 카르타고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버렸다. 그러나 로마를 도운 우티카의 페니키아인들은 살아남았다. 이후 우티카는 멸망한 카르카고 대신 새로운 북아프리카의 로마지역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 우티크임을 알리는 표석

나는 페니키아인이 세운 또다른 해양 도시국가 우티크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북부지역으로 가는 뱁사둔 르와지터미널은 이미 시장 장터마냥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전 7시가 다소 이른 아침이지만 튀니지에서는 모든 직장과 학교가 오전 8시부터 시작한다.

호객을 하는 운전기사에게 “윈 우티크?(우티크는 어디)”라고 말하자 멀리서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나에게 지금 출발한다고 하면서 빨리 타라고 재촉했다.

르와지를 타고 1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가니 우티크가 나왔다. 우티크는 아주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나는 서둘러 기원전 8세기 로마의 속주로 번창했던 유적지의 흔적을 찾아보려했다. 그런데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던 튀니지들에게 물어 다시 택시를 타고 20분쯤 더 달렸다.

그제서야 우티크 유적지가 보였다. 이 곳은 택시가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내가 타고온 택시기사를 3시간 후에 만나기 하고 유적지로 향했다.

매표소에서 튀니지 외교부가 발행한 거주증을 보여 주었더니 자기들 나라를 위해 온 꾸리(한국인)라면서 표를 사지말고 들어가라고 했다. 관광객들은 한두 명 보일뿐이었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거대한 석조물들이 보였다. 돌을 쌓아 올린 건물 흔적들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석조물 색깔이 검정색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방에 있는 고대 유적지 하고는 전혀 달랐다.

▲ 정교하게 딱아 있는 기원전의 도로 모습
▲ 마치 제주도 돌담길을 연상케한다.
▲ 우티크의 첫번재 거리와 저멀리 2번째 거리의 문이 보인다.

기원전 고대 도시국가에서 제주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곳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리움이 엄습해 왔다. 마치 제주도의 돌문화공원에 서 있는 것같은 희열을 느꼈다.

▲뜻밖에 제주를 만나다
앞서 말했듯 이곳 우티카는 페니키아인들이 만든 도시국가다. 로마가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후에 로마의 행정도시로 잠시 역할을 하다가 기원전 44년에 카르타고가 로마 도시로 재건되면서 그 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5편을 보면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로마 황제자리를 두고 싸운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폼페이우스군이 괴멸되면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살해당한다.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폼페이우스파를 정벌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상륙한 뒤 탑수스 전투에서 대승하고 우티카로 입성한다고 나와 있는데 그 우티카가 우티크이다.

▲ 이곳 빌라에서 많은 동물들이 묘사된 거대한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는데 원본은 지금 튀니지 바르도박물관에서 보관되어 있다.
▲ 주택 입구에 제주도 정낭과 같은 흔적이 보인다.
▲ 우티크에 남아있는 당시 거주지의 흔적들
▲ 기원전 로마의 속주였던 도시 모습, 아폴로 신전은 기두 잔해만 남아 있다.

지금의 유적지는 습지가 된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을 일부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 발굴된 유적지 속에서는 페니키아인들이 살았던 주거지와 로마인들이 살았던 빌라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로마인들이 살았던 빌라의 바닥에는 모자이크가 여전히 비바람에 노출돼 있기도 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원전의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안내표지에 '두 번째 문'이라고 쓰여 있다. 두 번째 문으로 들어서니 아폴로 신전의 기둥이 잔해만 남아 있었고 이어 거주지 지역이 나왔다.

돌담길을 따라 조금을 더 깊숙이 들어가니 주택 입구가 나타났다. 갑자기 나의 눈의 휘둥그레졌다. 정낭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만 정낭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 북아프리카 우티크에도 제주도와 같은 정낭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의 정낭처럼 사람이 안에 있고 없고에 따라 혹은 멀리 갔거나 가까이에 있거나의 상태에 따라 나무를 다른 형태로 걸면서 사용했는지는 알길이 없다.

거주지 속으로 빠져 들어가니 그 당시 이곳에 살았던 페니키아인과 로마인들이 왁자지껄하는 모습들이 마치 눈 앞에 보이는 듯 선하게 들어왔다. 목욕탕과 원형극장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빌라에서 제주도의 돌담길을 닮은 길을 거슬러 올라가니 무덤들이 나왔다. 모두 석관묘다. 이 석관묘는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페니키아인들의 무덤과 로마인들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설명서에는 지하 20피트(6.1미터)에서 발굴한 것이라 한다.

▲ 지금은 바다와 강이 습지로 변한 우티크의 모습

▲새로운 여행을 예고해준 택시기사
기원전의 우티크에서 나는 제주도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티크는 원래  마자르다(Medjerda)강 어귀에 있는 고대 항구도시였으나 지금은 지형의 변화로 강과 바다가 넓은 습지와 평원으로 변했다. 

택시가 올 시간이 됐다. 짧은 시간동안 돌아본 기원전 도시를 뒤로 한 채 유적지 매표소로 나왔더니 매표소 직원이 나를 찾는다. 나를 데리러 온 택시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밖에 나왔더니 모르는 택시 기사가 나에게 다가오면서 인사를 했다. 자기 동료가 튀니스로 가면서 자기에게 우티크 유적지에 가서 동양인이 태우고 와달라고 부탁을 해서 대신 왔다고 한다. 어쨌든 유쾌한 일이다.

그런데 그 택시기사가 나에게 뜻밖의 정보를 알려 주었다. 이곳 말고 페니키아인이 건설하였지만 잊혀진 도시가 전혀 파괴되지 않고 땅속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 도시가 케르쿠안(Kerkouane)이다  케르쿠안(Kerkouane) 유적지 여행기는 다음 회(34회)에 연재하고자 한다. <고병률 제주도작은도서관협회 상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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