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의 요구도 거절한 ‘사관의 기개’
하늘을 우러러 보며 직필로 일관
선비정신 ‘弘益사상’과 일맥상통

권력·사리사욕 챙기기에 매달린
김기춘 등 ‘일그러진 지식인’ 전형
‘최순실 국정농단’서 교훈 얻어야

조선의 태종(太宗)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태종은 사관에게 자신이 낙마한 사실(기록)을 지워주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사관(史官)은 그 내용을 지우지 않았을 뿐더러 임금이 간청한 내용까지 기록했다. 그가 바로 사관 민인생(閔麟生)이었다.

태종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기(氣)가 세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왕은 평소에 기거하는 편전(지금의 청와대 관저)에는 사관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인생의 기개는 남달랐고 전혀 굽힘이 없었다.

다음은 「태종실록」에 기록된 왕과 민인생의 논쟁이다.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했는데, 어찌하여 사관이 여기까지 들어왔는가?” 태종의 말에 민인생이 답했다. “비록 편전이라 할지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고 또 경연의 강론을 하는데, 신과 같은 사관이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태종이 민인생을 달랠 심산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사관의 편전 입시를 끝까지 허락하지 않겠다는 최후 통첩이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민인생이 아니었다. 그 대답은 이랬다. “신유불직 상유황천(臣如不直 上有皇天),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사관의 바로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유교를 이념으로 창건된 조선에서는 ‘하늘’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그리고 하늘은 곧 백성이었다. 시대가 역사를 중요시했기에 젊은 사관들은 투철한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직필을 휘둘렀다.

이런 사관의 기록은 실록(實錄)을 편찬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열람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왕이라 해도, 사관이 기록을 적은 왕이 승하한 이후에야 실록 편찬의 목적으로 열람이 가능했다. 때문에 사관은 왕과 권력자들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오죽하면 군왕이 싫어했던 자는 간관(諫官)이요, 군왕이 겁을 내는 사람은 역사의 붓자루를 잡은 사관이란 말이 나왔겠는가.

조선시대는 선비들이 국가와 사회를 주도해 이끌어가는 ‘선비사회’였다. 대개 선비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자신의 일에만 집착하는 고집스러운 학자를 연상케 하지만 실제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은 매우 다양했다. 고집스레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나간 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모순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개혁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고 나선 선비도 있었다.

이러한 조선시대 선비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었던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청렴과 소신, 도덕과 의리를 최우선의 덕목으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여기엔 널리 만인을 이롭게 하는 ‘홍익(弘益)’ 사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조선사회가 빠른 시일 내에 도덕적·정신적인 문화국가로 자리 잡으며 500년을 이어온 원동력이기도 했다. 민인생 같은 사관들의 직필과 굳센 기개 역시 선비정신의 기틀 위에서 형성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선비정신은 ‘개항과 근대’라는 세계사적 흐름에 묻혀버렸고, 이들이 가졌던 긍정적인 기능마저도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평가 절하됐다. 특히 일제가 식민지 지배 논리로 ‘조선 비하’에 주력하고 우리 스스로도 ‘자학적 사관(史觀)’에 빠지면서 선비정신은 빛이 바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와서 뜬금없이 조선의 ‘사관과 선비정신’을 거론하는 것은, 김기춘과 우병우, 안종범 같은 ‘굴절된 지식인’의 그릇된 행보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똑똑히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와 국민은 제쳐둔 채 권력(權力)과 사리사욕에만 매달렸다. 대통령에 대한 고언(苦言)이나 충언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들이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정수석, 경제수석 등의 제 역할만 충실하게 했더라도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회 청문회에 나와 이구동성으로 “나는 최순실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모습에선 분노에 앞서 일종의 절망감마저 느꼈다. 이게 바로 ‘일그러진 대한민국 지식인의 자화상’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歲寒然後知松栢之不彫)’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세밑 추위가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의 여순 감옥에서 남긴 글이기도 하다. 조선의 사관과 선비정신이 새삼 그리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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