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4·3연구소 주최 16번째 증언 본풀이마당
기념대회 관람중 송영호씨 부친 ‘억울한 죽음’

▲ 3월 31일 오후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가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 마련한 열여섯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에서 송영호 할아버지가 70년 전 3·1절 발포사건의 희생자인 부친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하다 잠시 기억에 잠겨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오수진 기자 rainmaker@jejumaeil.net

“산다는 게 무엇인지…70년 전 그날을 내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그의 아버지는 죽었다. 송영호 할아버지(82·도남동)는 3·1절 기념대회를 구경하다 희생된 부친의 죽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아버지의 복부를 관통한 탄알은 우리 역사 4·3과 그의 가족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3월 31일 오후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가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 마련한 열여섯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을 통해 송 할아버지는 70년 전 ‘3·1의 기억, 3·1의 그 현장’으로 돌아갔다.

열 두살로 되돌아간 송 할아버지는 우리가 ‘만세’를 부르며 기뻐해야 했던 날에 왜 그런 불상사가 있어야 했는가를 되물었다.

“그날의 발포는 틀림없이 사람들을 향한 ‘조준사격’이었어요. 희생자들의 총상 흔적이 모두 복부 아니면 가슴이었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살려달라고 애원하셨어요. 피를 흘리며, 물을 찾으며, 그렇게 나에게 살려달라고.”

송 할아버지는 그날, 그렇게 시작된 4·3으로 부친과 형님, 누님을 잃었다. 하지만 미군은 물론 우리 경찰로부터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언론에서 떠도는 26만 7000원이라는 위로금의 행방도 그에게는 여전히 ‘금시초문’일 뿐이다.

지금은 시국이 좋아 아주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송 할아버지.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산 사람은 살아야 했기에 억울하고 아픈 충격은 잊고 악착같이 살아내다보니 ‘이젠 편안해졌다’는 송 할아버지의 한마디는 무거운 낯빛의 그의 얼굴과 겹쳐져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는 또다른 외침으로만 들렸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송 할아버지에게는 한가지 소망만이 남았다. 4·3평화공원 한 모퉁이에 마련됐다 사라진 3·1절 발포사건 희생자 비석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구경하던 이들에게 관에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세월이 가서 용서는 하되 그날의 사실과 아픔을 후손들이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한켠에라도 남겨줬으면 고맙겠습니다.”

한편 제주4·3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사건’은 제주도민 3만명의 인파가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제주시내에 모여 기념식과 도로행진을 진행하던 중 기념행사를 관람하던 민간인 6명이 경찰의 발포로 숨지고, 8명이 부상을 입은 날이며 4·3의 첫 사상자가 발생한 날로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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