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강인한 함경도 사람’ 지칭
지금은 몰골사나운 모습 대명사
‘진흙탕 개 싸움’ 된 TV토론회

과거史 둘러싼 공방 되풀이에
‘돼지흥분제’ 사건 등 점입가경
‘진흙에서 피는 연꽃’ 희망을…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 즉위한 어느 날, 정도전에게 팔도(八道) 사람을 평해보라고 했다. 명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삼봉(三峰) 정도전의 입은 막힘이 없었다.

“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거울 속에 비친 미인)이요,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맑은 바람과 밝은 달)입니다.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바람 앞에 하늘거리는 버들)이고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굳은 절개), 강원도는 암하노불(巖下老佛·바위 아래 늙은 부처)입니다”

정도전의 거침없는 평은 계속 이어졌다.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봄 물결에 던져진 돌)이고, 평안도는 산림맹호(山林猛虎·삼림 속의 용맹한 호랑이)이며…” 함경도에 이르러 삼봉이 잠시 머뭇거렸다. 함경도는 바로 태조의 출신지였다.

아무런 말도 좋으니 어서 말해보라는 임금의 재촉에 정도전이 운을 뗐다.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입니다” 순간 태조의 안색이 싹 변했다. 눈치 빠른 삼봉이 곧 말을 이었다.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돌밭에서 밭을 가는 소)이기도 합니다.” 그제야 태조의 용안에 희색이 감돌았다.

기실 정도전이 말한 ‘이전투구’는 강인한 성격의 함경도 사람을 평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태조의 곡해(曲解)처럼 오늘날에 이르러선 ‘큰 명분도 없이 몰골사납게 싸우는 모습’을 지칭하는 말로 일반화됐다.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행 중인 TV토론회가 ‘이전투구의 장(場)’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것은 유세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은 간곳이 없고 네거티브 공방과 감정싸움이 판치는 중이다.

중앙선거방송토론위 주관으로 23일 열린 대선(大選) 후보 TV토론회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날 토론 주제는 외교안보 및 대북정책, 정치개혁 방안 등 두 가지였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한반도 위기설’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현 위기상황과 밀접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름이 고작 한 번 밖에 거론되지 않았을 정도다. 대신 ‘과거사’를 둘러싼 후보들 간 상호 비방은 더욱 거칠어졌다.

대선 정국의 최대 이슈로 부상한 ‘송민순 문건’을 놓고는 ‘거짓말 vs 색깔론’ 공방이 되풀이됐다. 유승민 후보(바른정당)는 문재인 후보(더불어민주당)를 겨냥 “국회정보위를 열어 당시 청와대·국정원 자료를 공개하고, 거짓말이 밝혀지면 후보직을 사퇴할 용의가 있느냐”고 공세를 퍼부었다. 홍준표 후보(자유한국당)도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가세했다.

TV토론을 통해 성가(聲價)를 높였던 심상정 후보(정의당)는 이날 ‘문재인 도우미’로 변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유 후보가 송민순 회고록 논란을 벌이자 중간에 끼어들어 문재인 후보를 엄호하며 유승민 후보를 맹공한 것이다. 때문에 지난 19일 토론이 끝난 뒤 문 후보 지지층으로부터 ‘문자폭탄’등 항의에 시달렸던 것을 염두에 뒀다는 반응이 나왔다.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홍준표 후보의 ‘돼지흥분제’ 사건도 도마 위에 올라 거센 비판을 받았다. 심상정·유승민·안철수 후보(국민의당)는 작심한 듯 모두 발언부터 ‘후보 사퇴’를 촉구했다. 국민적 자괴감과 국격(國格)을 생각할 때 사퇴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홍 후보가 “다시 한번 국민여러분께 사죄한다”고 밝혔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유승민 후보는 “민주당이 사퇴가 아닌 사과만 요구하고 있는 것은 홍준표 후보가 사퇴하면 문재인 후보가 불리해 그런 것 아니냐”며 더불어민주당까지 싸잡아 비판했다.

심지어 “제가 ‘갑철수’입니까? ‘MB의 아바타’입니까?”라며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질문도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말 대신 ‘이게 토론이냐’는 비아냥거림이 인터넷상에 나도는 이유다.

그렇다고 너무 자조(自嘲)할 필요는 없다. 성숙한 민주주의와 격조 높은 토론을 자랑하던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해 10월의 미국 대선 2차 TV토론은 그야말로 이전투구 그 자체였다. ‘음담패설 녹음파일’이 공개돼 사면초가에 몰린 트럼프가 클린턴의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성(性) 추문 스캔들’로 맞불을 놨기 때문이다.

토론이 끝나자 언론의 혹평이 쏟아졌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TV토론 사상 가장 추잡한 토론”이었다고 평가했다. CNN방송도 “90분 간 막말로 점철된 진흙탕 싸움”이라며 “일요일 밤 미국 정치가 바뀌었다”고 한탄한 바 있다.

“높은 언덕이나 육지에는 연꽃이 나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에서 이 꽃이 난다” 불교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이 말로 ‘이전투구’의 현실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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