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총리·장관 강조한 文 정부
脫원전 등 주요 정책마다
부처의견 사라지고 靑 목소리만

최근엔 검찰총장 발언 때문 곤욕
공직사회 ‘복지부동’ 우려
박근혜정권 몰락 원인 잘 새겨야

 

 

일일만기(一日萬機)란 말은 ‘천자는 하루 동안 만 가지 일을 처리한다’는 뜻이다. 공자가 중국 요순시대부터 주나라 때까지의 정사에 관한 내용을 엮은 책인 상서(尙書)에 나온다. ‘임금이 모든 정사를 돌본다’는 만기친람(萬機親覽)은 여기서 유래됐다고 한다.

만기친람을 선의로 해석하면 일종의 ‘일 중독’이다. 동양의 역대 군주 가운데는 조선시대 개혁군주로 불린 정조 임금, 결재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 정무를 처리했다는 중국의 진시황 등이 ‘만기친람 군주’로 꼽힌다. 하지만 모두가 만기친람을 할 수도, 그럴 능력도 없다. 더구나 왕조시대도 아닌 복잡다단한 오늘날에 이르러 만기친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만기친람을 둘러싼 일화도 있다.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의심이 많아졌다. 어느 날 제후와 장수들이 모인 연회 자리에서 건국 일등 공신 한신(韓信)에게 물었다.

“나는 몇 명의 군사를 부릴 수 있겠는가?” 한신이 대답했다. “한 10만이나 20만 정도의 군사는 부리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유방이 재차 질문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몇 명의 군사를 부릴 수 있는가?” 한신의 대답은 이랬다. “10만이든 100만이든 많을수록 좋습니다.”

순간 연회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심기가 불편한 유방이 다시 물었다. “나보다 더 많은 군사를 부릴 수 있는 능력 있는 자가 왜 내 밑의 장수이고 제후인가” 답변이 돌아왔다. “저는 수십만, 수백만의 군사를 다룰 줄 알지만 황제께서는 저 같은 수백의 장수를 다루고 수천의 인재를 쓰실 줄 아십니다. 그리하여 제가 장수이고 그대는 황제인 것입니다.”

실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속엔 만기친람도 좋지만 일 잘하는 자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격려하는 것이 오늘날 최고위 위정자(爲政者)의 역할임을 깨우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집권 3년차인 2015년 1월, 새누리당 심재철 최고위원에 의해 만기친람이란 말이 화제가 됐었다. 심 최고위원은 당시 예상되는 개각과 관련 “이번에 내각이 교체되면 대통령께서는 제발 ‘만기친람’하는 그런 모습은 좀 버리시고, 책임 총리제와 책임 장관제를 제대로 해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쓴소리였다.

모처럼 용기를 낸 고언이었건만 박 대통령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무리들에 둘러싸인 박 대통령으로선, 집권당 최고위원의 요구조차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흠집내기이며 배신이었을 터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간언(諫言)은 기대할 수 없었고, 결국 박 대통령은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부터 “내각은 총리 책임, 각 부처는 장관의 책임 하에 일하도록 하겠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청와대의 만기친람’이란 말이 나돈다. 장관들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 큰 수석들만 보인다는 것이다.

외교·안보를 비롯해 탈(脫) 원전 및 부동산 등 주요 정책마다 부처 목소리는 실종된 채 대부분 청와대가 주도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높다. 청와대에서 현안도 인사도 다 챙긴다는 푸념도 들린다.

최근엔 문무일 검찰총장이 자신의 발언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문 총장은 지난주 기자간담회를 통해 “지금처럼 모든 검찰 업무가 개혁·적폐 수사에 집중되는 상황은 연내에 마치는 걸로 계획하고 있다”며 “사회전체가 한 가지 이슈에 너무 매달렸는데, 이런 일을 오래 지속하는 것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이 알려지자 청와대와 여권이 즉각 반발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적폐청산(積幣淸算) 수사를 연내에 마무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일축하고 나섰다. 이어 “적폐청산은 인적청산이라는 의미 외에도 제도와 관행의 혁신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 위원장인 박범계 최고위원이 “문 총장의 말씀을 모든 적폐청산과 관련된 수사를 금년 내 마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하면, 김현 대변인 또한 “적폐청산 피로감 운운은 불법과 위법을 저지른 세력의 전유물이다. 국민의 뜻을 존중하며 흔들림 없이 적폐청산의 한길로 갈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옳은 목소리’는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청와대의 위세가 높을수록 각 부처 등 공직사회는 ‘복지부동(伏地不動)’에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문 대통령과 현 정부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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