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 이후
들불처럼 번지는 ‘미투운동’
문단 거목 고은 시인도 도마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인식 변화
‘권력형 성폭력’ 이제 그만…
그 책임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서지현 검사로부터 촉발된 미투(Me too) 운동이 마침내 한국 문단에까지 번졌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유명한 최영미 시인의 ‘괴물’이란 시가 재조명되며 문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K의 충고를 깜빡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Me too/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몇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괴물’이라 이름 붙인 이 시는 2017년 황해문화 겨울호에 실렸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노벨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En이 노벨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이 나라를 떠나야지/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괴물을 잡아야 하나.

시 속의 En이 고은 시인을 지칭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원로 문학평론가인 김병익(80)씨는 이번 파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는 “미투 운동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존경할 만한 것을 할퀴어 가치가 전도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은은 돌출적 존재로, 무조건적인 매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에 젊은 작가들은 ‘암울했던 시대에 그가 발휘했던 문학적 성취와 투쟁은 여기서 내려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위선과 비겁은 문학의 언어가 아니다’ ‘강자의 명예가 중하면 약자의 명예도 똑 같이 중하게 여겨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피력하는 등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문단의 미투 운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에도 김현 시인의 폭로로 트위터에서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공론화됐었지만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때문에 최영미 시인에 의한 ‘괴물’ 논란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나도 당했다’는 뜻을 지닌 #MeToo운동은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며 함께 연대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난 2006년 미국의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성범죄에 취약한 유색인종 여성 청소년을 위해 시작한 캠페인이다.

미투 운동 확산에 불을 지른 것은 배우 알리사 밀라노다. 그녀는 2017년 10월 성폭력을 고발하며 트위터를 통해 ‘미투 해시태그(#MeToo)’를 제안했다. 이른바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스캔들이다. 그는 펄프 픽션(Pulp Fiction)과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등의 영화를 제작한 헐리우드 거물이었다.

그러나 폭로 이후 죄과가 낱낱이 드러났다. 지난 30여년 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여성 배우 및 직원들에게 성추행과 성폭력 등을 저질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일로 인해 하비 와인스타인은 자신이 설립한 와인스타인 컴퍼니에서 해고됐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에서도 제명됨으로써 완전히 몰락했다.

와인스타인 사건은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권력형 성폭력’에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류의 성범죄 피해자는 상대방을 고발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가해자를 고발해도 권력 차이로 인해 피해자가 오히려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만연해 있는 사회적 편견 또한 고발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8년 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서지현 검사가 용기를 내고 성추행 폭로에 나선 것은 가해자의 위선적인 행동 때문이었다고 한다. 교회에서 스스로를 미화하는 간증 모습을 보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추행을 당했다는 수치심 등으로 유산까지 했던 그녀였다.

검찰 조직 내의 성추행 폭로 이후 서 검사에 대한 응원과 함께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는 ‘미투 운동’이 정·재계를 비롯해 대학가와 문화예술계 등 사회전반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더 이상 참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용기와 결단 등 여성들의 인식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각의 ‘남자검사 잡는 꽃뱀’ 주장 등으로 고발자들이 2차 피해에 시달리는 것 역시 우리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영화 ‘굿 윌 헌팅’에는 어린 시절 양아버지의 폭력에 힘들어하면서도 되레 자신을 책망하는 등 세상을 향해 굳게 닫혀 있던 주인공 윌의 마음을 녹여주는 명대사가 나온다. 그 한마디는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였다. ‘굿 윌 헌팅’이 하비 와인스타인이 제작한 영화라는 점에서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미투 운동’에서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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