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폭동·항쟁·사건 등 다른 호칭
‘正名’ 씨앗 역사의 정원에 심을 때

 

 

꾸준히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詩) 김춘수의 ‘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정해진 이름도 없이 가슴에 아픔이 뿌리내리던 날짜로 불리는 ‘제주 4·3’은 70년 전, 따뜻한 제주에 상륙한 냉전(冷戰)의 차가운 기운은 광풍으로 변해 평화의 섬 전체를 휩쓸었다. 매년 여름철 불어 닥치는 태풍에도 이름이 있는데, 정부 수립 이래 전쟁을 제외하고 가장 큰 상흔을 남긴 광풍에는 이름이 없다.

1954년 9월까지 지속된 이름 없는 광풍은 영문 모를 수많은 희생자와 불가해(不可解)한 괴로움을 가슴에 안은 유족들을 낳았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으로 촉발됐던 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5000~3만여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아픔의 크기만큼 강한 힘이 침묵을 강요했다. 그 일에 대한 발설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숨죽여왔던 역사는 무명(無名)의 고통으로 남았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실체는 있으나 이름은 없는 괴로움이 각인된 이들은 그저 속으로 “살암시민 살아진다”고 되뇌며 제각기 괴로운 몸짓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외면한 것들의 이면에는 아직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존을 위한 외로운 몸부림이 자리해 있던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은 70년 전의 참극의 시간을 봉기·폭동·항쟁·사건·사태 등 이념이나 신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불렀다. 제주4·3을 칭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은 기억이 다양하다는 것과 동시에 4·3의 기억을 외면하는 사이 시도된 왜곡의 가능성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분열의 상흔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통합은 어설픈 절충이 아니다.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다.

하나의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그 시기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각각의 기억을 모아 통합하고 그 시간의 의미를 새로이 하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제주4·3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작업이 여전히 진행 중인 것과 마찬가지로 제주4·3의 이름을 정립하는 이 작업도 완료되는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제주4·3의 경우 정부가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한 유일한 과거사인 데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공식사과를 함으로써 일각에서는 과거사 해결의 전범(典範)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제주4·3은 피해 규모나 역사적 위치가 남다른 점 등으로 국내 과거사 해결 사례 가운데 맏형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정명(正名)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작년 12월 발의되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제주4·3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은 제2조 정의규정에서 광풍이 제주를 휩쓴 기간에 대한 기존의 두루뭉술한 정의를 좀 더 명확히 함으로써 ‘4·3의 이름’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우리의 역사, 대한민국의 역사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 제주4·3은 어떤 이름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서두에 언급한 ‘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로 이어진다. 제주의 아픔을 넘어 4·3의 전국화, 세계화를 지향하는 것은 한국사 나아가 세계사의 정원에 조화로운 자태로 자리 잡은 한 송이 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正名)의 씨앗을 역사의 정원에 심을 때다.

제주4·3이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바른 이름으로 꽃필 때 역사의 상처를 교훈삼아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의 상징으로 거듭날 것이다. 분노와 미움에 기반한 분열과 갈등이 되풀이되는 우리나라 정치구조에도 큰 교훈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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