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경험 말하기가 ‘치유의 첫 걸음’
의료 넘어선 다각적 지원모델 필요

 

 

올해는 제주4·3에 있어 획기적인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70주년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 국가원수로서 제주4·3에 대한 공식 사과를 한데 이어 ‘완전한 4·3해결’을 위한 정부차원의 노력도 약속했다.

특히 70주년을 계기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대내외적 4·3 알리기가 행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그러나 오랫동안 4·3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진상 규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생존자 개인의 경험과 치유는 상대적으로 간과돼온 것이 사실이다.

치유 받지 못한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과거가 아닌 현재가 된다. 때문에 언제라도 4·3과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4·3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이것이 다시 자아를 상처 입히는 방식으로 재현, 반복된다.

지금도 자동차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갑자기 구토증세가 나타나고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고 호소하는 4·3생존자가 있다. 4·3 당시 호루라기를 불며 사람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고 차에 올라타서 호송되었던 기억(학살로 이어지는)이 떠오르는 것이다.

제주여성가족연구원은 4·3 트라우마와 치유, 그리고 여성의 경험에 주목하여 지난 10일 제주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와 함께 ‘4·3 경험과 여성·가족의 삶’을 주제로 공동포럼을 추진했다. 이 자리에서는 성 인지적 관점(gender sensitive perspective)의 4·3 연구,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트라우마 심층조사 및 치유프로그램 운영 방안, 제주트라우마치유센터 구축의 필요성과 함께 우려되는 지점 등이 제시됐다.

특히 조사결과 4·3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는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3 트라우마 실태조사를 분석한 결과 여성이 남성보다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더 심각하게 겪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4·3을 연구한 몇몇 연구자들은 사회적으로 여성 생존자들의 증언, 즉 경험담이 ‘신세타령’이나 ‘고생담’과 같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는 점에 아쉬워하고 있다. 때문에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대하여 말하기를 거부당함으로써 말하지 못한 고통은 한으로 남게 되고, 이로 인해 여성의 경우 ‘화병’을 평생토록 앓게 되는 경우가 많고 심리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분석했다.

여성주의 철학자인 수잔 브라이슨은 성폭력과 같은 트라우마를 경험한 이들에게 그 경험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길이자 생존을 위해 필수적임을 ‘이야기해 다시 살아나’라는 제목의 자서전적 글쓰기를 통해 몸소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성폭력뿐만 아니라 전쟁 참여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같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의 치유를 위해서 자신의 경험한 것에 대해 말하기가 갖는 힘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던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과 기억을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지점에서 4·3에 대한 말하기는 이미 ‘치유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다. 향후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4·3생존자 개인의 경험·트라우마·기억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드러내기에 주목함으로써 진정한 치유의 의미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제 무엇보다 4·3 생존자의 치유에 대한 접근은 관련 프로그램과 콘텐츠 개발 등 소프트웨어적 접근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단지 외형적인 트라우마치유센터 건립에만 몰두해서는 안 되며, 의료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다각적 차원의 지원 모델이여야 할 것이다.

타 지역 선행 사례인 광주트라우마센터 모델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본원에서는 성 인지적 관점에서의 4·3 연구와 치유 프로그램 및 콘텐츠 개발 등을 추진함으로써, 4·3 생존자들의 진정한 치유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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