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비슷하나 뜻은 엄연히 달라
‘위한다’와 ‘더불어’의 차이
孟子 강조한 건 ‘위민’아닌 ‘여민’

우리 역사의 최고 聖君 세종대왕
평생 ‘與民同樂’ 솔선수범
유권자가 깨어있어야 가능한 삶

 

권철은 조선 중기(연산~선조)의 문신(文臣)이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권율 장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의정을 지내던 어느 날, 권철이 평소 추앙해 오던 퇴계(이황) 선생을 찾아갔다.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했다. 이윽고 저녁상이 나왔는데 보리밥에 반찬은 콩나물국과 산채, 북어 무친 것 등이 전부였다. 조선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領議政)이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식사를 내왔던 것이다.

진수성찬에 맛을 들인 권철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 리가 없어 몇 숟갈 뜨는척하다가 상을 물렸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똑같은 음식이 나왔다.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 예정을 앞당겨 부랴부랴 떠나면서 권철은 퇴계 선생에게 좋은 말씀을 부탁했다.

그러자 선생이 말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지(陋地)를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대접을 못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는 성찬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꽁보리밥에 된장찌개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대감께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스러웠습니다”

이어 선생이 말을 이어갔다. “무릇 정치의 요체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행정에 심열성복(心悅誠服·마음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해 순종함) 하겠나이까?” 퇴계 선생이 아니고서는 감히 영의정에게 말할 수 없는 직간(直諫)이자, 폐부를 찌르는 충언이었다. 대인의 풍도를 지녔던 권철도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음은 물론이다.

여민동락은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라는 뜻으로 『맹자(孟子)』에서 유래됐다. 백성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통치자(위정자)의 바른 자세를 일깨우고 있다. 맹자는 인의와 덕으로써 다스리는 ‘왕도(王道)정치’를 주창했는데, 그 바탕에는 백성을 정치 행위의 주체로 보는 민본(民本) 사상이 깔려 있었다. 무려 2000년 전의 일이다.

위민과 여민은 얼핏 비슷한 말로 보이지만 그 뜻은 엄연히 다르다. 통치자의 입장에서 위민(爲民)이 ‘백성을 위한다’에 방점을 찍고 있는 반면 여민(與民)은 ‘백성과 더불어’란 의미를 지닌다. 전자가 정치 대상으로서의 시혜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후자는 정치의 한 주체이자 동반자를 의미한다.

맹자의 논리를 따르면 군주의 위상은 백성에게서 통치를 위탁받은 국가경영 관리자에 불과하다. 군주가 관리자로서의 선을 넘어 국가의 소유자임을 자처할 때, 백성이 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라는 것이다.

세계의 정치사를 보면 ‘백성과 나라를 위한다’는 위민정치는 곧잘 독재로 흐른 경우가 많았다. 히틀러가 ‘게르만 민족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등 인류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도 국민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넘쳐났다. 지난 1968년 12월 5일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된다.

필자도 국민(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끝나고도 학교에 남아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느라 혼신을 다했다. 빨리 암기하는 사람에게 나눠주던 ‘강냉이떡 한 조각’도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개인의 행복보다 국민과 나라를 강조하던 그런 하수상한 시절이라 모든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게 ‘독재화’로 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다.

엊그제 모 TV방송에서 ‘세종대왕의 리더십’ 강좌를 우연히 시청했다.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의 통치철학과 정치적 목표는 ‘백성과 더불어’ 바로 그 자체였다. 대왕은 그 무엇보다 노인과 죄수 및 고아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힘썼다. 당시 가장 비천했던 노비(奴婢)에게 지금보다도 앞선 출산휴가를 시행한 것도 세종이었다. 백성들이 글을 몰라서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보고 한글을 창제한 것은 ‘여민동락’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13 지방선거가 이제 불과 22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에 나선 후보들의 지향점은 과연 ‘여민’일까, 아니면 아직 ‘위민’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유권자가 늘 깨어있어야만 ‘여민동락’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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