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2인자’ JP 23일 별세
한국 정치사 큰 족적 남겨
‘3김 시대’도 이제 역사 속으로

‘여유와 타협·촌철살인’의 大家
훈장 추서 찬반 논란 가열
‘허업’ 후배 정치인에 대한 警告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지난 23일 타계했다. 향년 92세. 이로써 한국의 현대정치사를 풍미했던 ‘3김(金) 시대’도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갔다.

그에겐 JP 말고도 숱한 별칭이 따라다녔다. 바람과 구름을 몰고 다닌다는 ‘풍운아’부터 ‘영원한 2인자’와 ‘킹 메이커’에 이르기까지…. 그 속엔 한 인간의 인생 역정과 영욕(榮辱)으로 점철된 정치 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JP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를 도와 5·16 군사쿠데타에 성공하면서다. 이후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권 2인자’의 길을 걸었다. 1961년 초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고,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정부의 정치자금 확보 과정에서 불거진 ‘4대 의혹 사건’의 책임을 지고, 그해(1963년) JP는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긴 채 외유에 나서야 했다.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정치 인생의 서막이었다.

한·일 외교 파동 등 숱하게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JP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1971년 마침내 국무총리에 오르는 등 박정희 정권에서 확고한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럼에도 끝내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영원한 2인자’로 머무는데 만족해야 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던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신군부((新軍部)가 집권하면서 JP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결국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JP는 한국사 격변기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역량이 다시 빛을 발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운동 이후였다. 1990년 1월 노태우·김영삼·김종필 간 ‘3당 합당’은 대한민국 정치 지형까지 변화시켰다. 그리고 YS가 민주화 세력 가운데 첫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도움으로써 문민(文民)정부의 출범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1997년엔 김대중·김종필 진영 간의 ‘DJP 연합’으로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첫 수평적 교체를 이뤄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맥(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거쳐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까지 맞닿아 있다.

그러나 JP의 한계는 바로 거기까지였다. 정적(政敵)이었던 YS와 DJ를 대통령으로 만든 ‘킹 메이커’가 됐지만, 정작 자신은 대통령에 오르지 못한 채 ‘영원한 2인자’에 머물렀다. 또한 그의 정치적 소신이자 신념이었던 ‘의원 내각제’의 꿈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2년)을 다녔던 이력에서 보듯이, JP는 틀에 꽉 박힌 전형적인 군인은 아니었다. 비록 육사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로 들어섰지만 1950년대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엘리트였다. 그가 생전에 보였던 ‘여유와 타협’의 정신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JP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어록으로도 유명하다. 매 고비마다 ‘외유내강’으로 난관을 돌파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끝나고 신군부가 실세로 등극하자, 그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화두로 던진 것은 대표적인 예다.

물론 JP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조국 근대화 작업에 초석을 쌓았다는 호평이 있는가 하면, 한일 협상과 관련 얼마 안 되는 돈에 나라의 자존심을 팔아넘겼다는 비판도 상존한다. 고인에게 훈장(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겠다는 정부의 방침과 관련 ‘역사에 큰 족적’과 ‘독재권력 부역’ 등으로 나뉘어 찬반 논란이 벌어지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하자 중국에선 ‘문화혁명’ 등의 실패를 들어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과 격하운동이 크게 일었다. 그때 문화혁명의 최대 피해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이 ‘과오보다는 공이 많다’는 공칠과삼(功七過三)의 논리를 내세워 논란을 잠재우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우리도 과거에 너무 집착하기보다는 이 같은 ‘공칠과삼의 지혜’를 한번 발휘하는 것은 어떨까.

JP는 정계 은퇴 후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곧잘 강조했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해야 한다는 것으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자 후배 정치인들에 대한 경고였다.

이제 ‘영욕의 정치 풍운아’였던 김종필 전 총리는 우리 곁을 떠나서 역사 속으로, 영원한 안식의 길로 들어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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