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영원한 스승 법정 스님
“비움 통해 初心 회복” 역설
아름다운 마무리는 새로운 시작

연초 大法官 퇴임한 박보영 변호사
‘꽃길’ 버리고 ‘시골판사’ 지원
황금만능시대 ‘신선한 충격’ 안겨

 

 

‘내려놓음’은 불교의 선심소 가운데 하나인 사(捨)를 말한다. 또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인 자(慈)·비(悲)·희(喜)·사(捨) 중 사무량심(捨無量心)에 해당된다.

종교를 떠나서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법정 스님은 생전에 ‘아름다운 마무리’란 산문집을 남겼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는 게 글 전체를 관통하는 요체(要諦)였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글은 계속 이어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불현듯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란 글이 떠오른 것은 어느 전임 대법관의 ‘아름다운 선택’ 때문이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올해 1월 퇴임한 박보영(57·사법연수원 16기) 전 대법관이다.

박 전 대법관은 최근 법원행정처에 전남 여수시 시·군 판사로 일할 수 있는지 타진했다고 한다. 시군 법원은 3000만원 미만 소액심판 사건이나 즉결심판 사건 등을 다루는 소규모 법원이다. 지난 1995년부터 법원은 법조 경륜이 풍부한 원로 법조인들이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의미로 시군 판사 제도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일부 법원장 출신이 시군법원 판사로 근무한 사례는 있지만, 대법관을 지낸 인사가 지원한 사례는 없다. 밝디 밝은 ‘전관(前官) 꽃길’을 마다하고 시골판사를 택한 박보영 전 대법관의 행보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법관 출신이 대형 로펌에 들어가거나 변호사로 개업하면 ‘이름값(도장값)’이 3000만원, 수임료는 최소 1억원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같은 잘못된 관행은 우리 대법원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 대법원이 한해 처리하는 본안 사건은 평균 4만 여건을 상회한다. 지금의 대법관(대법원장 포함 14명)만 갖고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규모다.

그러다 보니 3심 상고(上告)사건은 대부분 재판연구관 단계에서 처리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대법관 출신 변호사 도장이 찍혀 있어야만 그나마 대법관들이 사건을 검토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이른바 도장값 관행을 낳게 했다. 법조계에 ‘전관예우’가 뿌리 깊은 이유다. 그것은 안대희 전 대법관이 퇴임 후 변호사 생활 5개월 만에 16억원을 번 사실이 밝혀져 국무총리 후보자에서 낙마(落馬)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박 전 대법관이 탄탄하게 보장된 꽃길을 놔두고 시골판사의 길을 택한 것은 ‘진정한 용기’가 없으면 감히 엄두를 못 낼 파격적인 일이다. 그만큼 그는 용기를 냈고 이제 ‘비움’의 길을 통해 다시 자신을 새롭게 채우려고 한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박보영 전 대법관은 판사로 재직한 18년 동안 가정법원이나 지방법원에 주로 근무했다. 시쳇말로 ‘꽃보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4년 변호사로 개업한 그가 2012년 대법관으로 지명될 때 ‘비서울대(한양대) 출신 싱글맘’으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진가(眞價)가 드러난 것은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였다. 평소 칭찬에 인색한 여야 의원들은 ‘소수자 및 약자의 대변자’ ‘다양성의 아이콘’ 등 호평을 아끼지 않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 대법관을 발탁한 것은 현재 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었다.

박 전 대법관이 시·군 법원 판사로 임용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앞으로 법관인사위원회와 대법관회의의 동의도 받아야 한다. 이번 건과 관련해 법조계와 국민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가 임용된다면 ‘전관예우와 황금만능주의’를 경계함은 물론 직업적 소명의식에 충실한 그 모습 자체가 우리 사회에 아주 소중한 귀감(龜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도중 노회찬 국회의원(정의당)이 서울 중구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비보(悲報)를 접했다. ‘진보정치의 상징’이자 유머를 겸비한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대가’였던 그의 죽음은 우리 정치계로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와 원인이야 어떻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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