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국사·일연스님 넋 서려있는
청도 雲門寺서 만난 어떤 글
나이 들어 발견한 삶의 지혜 가득

‘100세 시대’ 더 팍팍해진 노년
돈욕심 등 버리고 德 쌓아야
인간관계 회복 급선무로 떠올라

 

지난 추석(秋夕)을 대구에서 지냈다. 바로 밑에 동생이 그곳에 살고 있어 설은 제주에서, 한가위 차례는 동생 집에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귀성(逆歸省) 범주에 속한다.

오전에 차례를 지낸 후 제주에 내려올 요량으로 일찌감치 항공권 예매에 나섰으나 낮 12시~오후 6시 표는 벌써 동이 나 있었다. 남아 있는 2박3일의 추석 연휴가 이들을 여행길로 유혹한 것이다. 새삼 달라진 명절 풍속도를 실감했다.

저녁 비행기라 6시간 넘게 TV만 보기도 민망해서 동생 가족과 함께 대구 인근의 청도 운문사(雲門寺)를 찾았다. 운문사는 예상과 달리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건립된 천년고찰(千年古刹)이었다. 당초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고려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라고 사액(賜額)한 뒤부터 운문사로 불리고 있다 한다.

운문사는 유서 깊은 절이기도 하다. 신라의 원광국사가 ‘세속오계(世俗五戒)’란 가르침을 만든 곳이며, 고려 때 일연(一然) 스님이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원응국사비(圓應國師碑)와 석조여래좌상 등 보물급 문화재도 7점에 달한다. 절 입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도 있었다. 운문사는 지난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 강원(講院)으로 선정되어 지금은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뜻밖의 공짜 절 구경을 해서 조금이라도 보탤 겸 경내에 있는 기념 가게에 들렀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두루마리에 ‘노년의 지혜’라고 이름 붙인 글이었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 글은 ‘친구여’로 시작된다.

친구여! 나이가 들면 설치지 말고 미운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리와 불평이랑 하지 마소. 알고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적당히 아는 척, 어수룩 하게 사는 것이 편안하다오. 친구여! 상대방을 꼭 이기려 하지 말고 적당히 져 주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그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친구여! 돈, 돈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것. 많은 돈 남겨 자식들 싸움하게 만들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주변에 뿌려서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 정말로 돈을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꽉 잡아야 하오. 옛 친구를 만나거든 술 한 잔 사주고, 불쌍한 사람 보면 베풀어주고, 손주 보면 용돈 줄 돈이 있어야 늘그막에 내 몸을 돌봐주고 모두가 받들어 준다오. 우리끼리 말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라오.

친구여! 옛날 일들이랑 모두 다 잊고, 잘난 체 자랑일랑 하지 마오. 우리들의 시대는 다 지나가고 있으니 아무리 버티려고 애를 써 봐도 세월은 잡을 수가 없다오. 그대는 뜨는 해, 나는 지는 해, 그런 마음으로 지내시구려. 자녀와 손자, 모든 이웃들에게 마음씨 좋은 이로 살아가시오. 그렇다고 미련하면 안 되오. 아파도 안 되오. 그러면 괄시를 한다오. 아무쪼록 한 가지 취미라도 가져 재미있게 오래 오래 살으시구려….

요즘 신조어(新造語)에 ‘웃프다’는 말이 있다. 웃기면서 슬프다는 뜻이다. 특히 ‘돈’에 관한 이야기는 정곡(正鵠)을 찌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돈이 없으면 가족은 물론 주변의 괄시를 받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부 등이 나서 ‘100세 시대’를 외치고 있지만 노년(老年)의 삶은 전보다 더 팍팍해졌다. 옛날엔 정년 퇴직 후에 10~20년을 살면 되었으나, 이제 30~40년을 더 살아가야 할 생각을 하니 일부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막막하다. 주변을 보더라도 노는 사람이 없다.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일에 매달리고 있다. 사정이 그렇기에 우리네 인심(人心) 또한 아주 삭막해졌다.

신혜경 시인은 ‘사람’이란 제목의 시에서 이렇게 읊은 바 있다.

한문수업 시간/정년퇴임 앞둔 선생님께/제일 먼저 배운 한자는/옥편의 첫 글자 한 일(一)도 아니고/천자문의 하늘 천(天)도./그 나이에 제일 큰 관심사였던/사랑 애(愛)는 더더욱 아니고/지게와 지게작대기에 비유한 사람 인(人)이었다/

마흔을 훌쩍 넘은 지금도/사람 인(人)자를 바라보고 있으면/등 기대고 있는 한 사람이 아슬하다/너와 나 사이가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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