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개 섬들의 숲’ 바다풍경 압권
기암절벽 길 다양한 역사문화 품어
과거 난진압 전함 머문 군사 요충지

조선시대 유배객 흔적도 곳곳에
최근엔 문화 가꾸는 관광의 섬으로
느림의 미학 실천하는 ‘산책의 섬’

 

섬들의 숲 추자도를 다시 찾았다.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가 연출하는 바다풍경이 압권이다. 그래서 우두일출과 직구낙조 등의 추자10경이 탄생했나 보다. 배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기암절벽을 품은 길과 다양한 역사문화가 숨어있다니.

추자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270년대 부터란다. 추자항의 옛 이름인 당포(堂浦)는 육지의 곡식을 제주로 이송하는 해상 요충지였다. 삼별초를 공격하려 1273년 여몽연합군이 전함 160여 척을, 목호를 공격하려 1374년 최영장군이 전함 314척을 잠시 피난케 했던 군사 요충지이기도 하다.

최영장군 사당 참배 후 걷는 해안절벽 위의 나바론 길은 모험이고 기쁨이었다. 돈대산 자락으로 둘러쌓인 묵(默)리 마을의 당목치 절벽 위에 세워진 처녀당을 찾았다. 집 떠난 자식들을 생각하며 마을 수호신으로 좌정한 아기업개의 명복을 빌기도 했다. 파도소리 들으며 신양리 몽돌해변을 거닐기도, 김수환 추기경께서 어렵게 갔었던 예초리 황경헌 무덤도 찾았다.

황경헌은 천주교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의 아들이다. 황사영의 처인 정난주는 제주도 유뱃길에 안고 갔던 젖먹이 황경헌을 예초리 바닷가에 몰래 두고 떠난다. 그후 황경헌은 오씨 성을 가진 어부의 손에 의해 키워지고, 그래서 추자도의 황씨와 오씨 집안은 결혼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추자도와 제주본섬 중간지점에 위치한 관탈(冠脫)섬도 아스라이 보였다. 옛날 제주로 귀양가는 선비가 갓과 관복을 벗고 평민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던 섬이다. 정조 때 임금의 도장을 함부로 사용했다 하여 유배된 대전별감 안조원은, 추자도에서 지은 만언사(萬言辭)에서‘내 눈물 모였으면 추자섬을 잠기게 하였으며, 내 한숨 풀었으면 한라산을 덮었으리라….’라고 읊었다. 이를 읽은 궁녀들이 눈물을 흘리고, 이를 들은 정조임금께서 그를 풀어줬다는 일화도 전한다.

제주목사였던 조정철은 제주목에 이어 추자도에 유배되는 기구한 삶을 살았다. 유배가 풀린 조정철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잃은 홍윤애와 딸을 위해 제주목사로 자원한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영흥리 골목길 따라 산으로 오르다보면 유배인을 모신 추자처사각이 나온다. 마을 사람들에게 불심을 알리고 병도 치료해 주었던 처사 박인택을 위해 후손들이 지은 사당이다. 이밖에도 속사미인곡을 지은 이진유 등 추자도에 유배되었던 15여 명의 유배객 흔적을 여러 모습으로 남기는 것도 추자도의 역사문화를 가꾸는 일이리라.

20년전 시끌벅적한 교실풍경을 영상에 담으려 왔던 나는, 다음 날 새벽 산책길에서 예초리 입구를 지키듯 서있는 그 엄바위를 만났다. 수많은 뿌리들이 엄청난 크기의 바위를 타고 올라 감싸안듯 보듬는 모습에 마음이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다시 찾은 엄바위는 무성했던 뿌리가 사라진 채 외로이 서 있었다. 마치 떠나간 이들을 멀똥멀똥 쳐다보듯. 당시엔 귀하신 물을 우물이나 샘에서 여러 가정으로 보내는 고무호수들이 마을 도처에 어지러울 정도로 널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닷물을 끌어와 담수시켜 가정에 보내는‘통합고도정수처리시설’이 들어서 추자도의 물걱정을 해결하고 있었다. 삶의 흔적인 우물이나 샘들을 잘 정비하는 것도 추자도의 역사문화를 가꾸는 일이리라.

바람을 피하려 들리는 섬이라 하여 후풍도(候風島)로 불렸던 추자도의 속살을 보고자 주민들도 더러 만났다. 몇 년 전만 해도 대서리 포구 도처에서 불 수 있었던, 갓 건져온 참조기떼들을 그물에서 떼어놓는 진풍경을, 이젠 볼 수 없다 한다. 일손이 모자라 제주와 한림 등지로 조깃배가 출장원정을 나가야 한단다.

한 때는 7천여 명이나 살았던 추자도로 관갱객들이 몰려들고 있다. 세월의 파고가 추자 바당 놀만큼이나 높다. 내가 만난 추자도는 느림의 미학을 실현하는 산책의 섬이다. 산둥성이를 넘으면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나리라는 기대와 셀렘이 나그네를 도처로 유혹한다. 비경과 비사가 널려진 추자도는 문화를 가꾸는 관광의 섬으로 거듭 나고 있었다.

저작권자 © 제주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