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설을 맞는 기해년은 황금돼지의 해이다. 오래전 중국에서는 돼지를 황금처럼(?) 키우는 제주도를 주호(州胡)라 했다. 다음은 3세기 경 편찬된‘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의 내용이다.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큰 섬을 주호라 한다. 그 섬사람들은 체구가 작고 언어는 한(韓)나라와 다르며, 머리를 짧게 깎으며, 가죽옷으로 윗도리만 입는다. 소와 돼지를 잘 기르고 배를 타서 한(韓)나라와 중국과 왕래하며 장사를 한다.”

제주에서 돼지산업이 가장 번성한 곳은 한림읍이다. 한림읍의 옛 이름은 널따란 숲의 의미인 한수풀이다. 그래서 한림읍에는 대림리, 월림리, 한림리, 명월리 고림동 등 숲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며 무성한 숲은 사라졌다. 반면 선인들이 일군 역사문화는 고스란이 남아, 이제나 저제나 후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에 부응하려 한림중학교 한림여성농업인센터 사)질토래비가 협약을 맺어 걷고자 하는 길이 ‘한수풀역사문화걷는길’이다.

2014년 필자가 재직했던 한림공고에서도 이미‘한수풀역사순례길’을 개장한 바 있다. 그 길은 명월포, 명월진성 성곽길, 만벵듸4·3길 등 10km에 이르는 여정으로, 새별오름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이후 필자는 여러 분들과 함께 이 길을 다니고 있다. 특히 한림중 3학년 학생들과 2시간의 걷는길을, 한림여성농업인들과는 버스로 기존의 순례길을 동행한 후, 두 길을 하나로 엮어 도민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트는 길이 한수풀역사문화걷는길이다.

이 길은 옹포포구, 마대기빌레, 월계정사, 명월진성, 개영물과 옹포천공원, 한림읍4·3유적지로 이어진다. 옛 명월포인 옹포는 해상의 요충지이자 명월진성의 관문이었다. 이곳 주변에는 감태공장과 통조림공장 등 일제의 흔적뿐만 아니라, 금악리 만벵듸묘역에 모신 영령들이 마지막으로 수용되었던 한림어업창고와 4·3관련 유물유적들이 꽤나 많이 남아있다.

오래전 한수풀 목장지역에서 길러졌던 말들은 명월진성 근처에 가두어졌다가, 명월포를 통하여 실려나가곤 했다. 바람 영향으로 배에 실리기 전까지 말들을 대기시켰다 하여 이름 지어진 마대기빌레는, 지금은 농경지와 주택지 등으로 개발되어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한 뼘의 농토라도 일구기 위해 애쓴 선인들의 피땀어린 현장이다.

한림읍이 낳은 명의 진국태를 연상케 하는 월계정사는 15세기 문헌상에 나타나는 제주 사학의 효시이다. 이후 월계정사는 1831년 개량서당인 우학당(右學堂)으로, 1923년 개교된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등학교)로 전승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수풀지역의 중심지인 명월에 1437년 방호소가, 1510년 진성이 들어선다. 명월진성이 지어진 것은 비양도 주변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해안 마을에 몰려와 주민에게 해를 입히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고자, 장림 목사가 목성을, 임진왜란 전후하여 이경록 목사가 석성을 쌓아 진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이원진 목사가 1653년 제주의 석학인 고홍진의 감교를 통하여 편찬한 탐라지에는 ‘성안에는 샘이 있어 사시사철 물 걱정이 없었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 샘물 중 하나가 지금의 한림정수장 근처에 있는‘개영물’로 여겨진다.

이형상 목사가 1702년 제작한 탐라순력도에는, 명월진성에서의 활쏘기 시합인 명월시사(明月試射), 군사들의 훈련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명월조점(明月操點), 비양도에 사슴을 방사하는 비양방록(飛揚放鹿)이 그려져 있다. 이렇듯 이곳은 선사시대와 고려·조선·일제 강점기와 산업화 초기의 유물까지 다양한 볼거리들이 넘치는 곳이다. 이를 보여주는 가칭 (노천)한수풀박물관이 들어서길 기대해 본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곧 미래 산업으로 이어지는 시대이다. 이에 이르는 길은 역사문화 공유를 통해서 가야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걷고자 하는 길은 행복의 길이다. 곧 개장하는 한수풀역사문화걷는길 역시 행복의 길로 가는‘한질’이 되길 두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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