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일제는'병합'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조선총독부 주도 하에 지배구조로 재편키 위하여 급기야는 1910년대에 폭압적 무단통치를 강행하였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이 박탈당했다. 민족교육이 억압받고, 민족적 신앙이 탄압 당했다. 정치·사회뿐만 아니라 경제적 수탈이 이루어졌다. 민족자본가의 성장이 가로막혔고, 광대한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그 결과 경작권 등 농민의 권리가 완전히 부정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거국적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1910년대 말에는 국제정세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를 위한 미국‘윌슨’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나라를 비롯 식민지 약소국가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역사적으로 3.1운동은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극소수 친일파·친일지주·예속자본가를 제외한 전(全)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투쟁 등을 하나로 묶었던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족운동이라 자평할 수 있다.  3.1 운동의 결과 당대의 민족해방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민주공화주의 이념이 확산되면서는 공화제 형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의 촉진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운동을 지도할 조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과정에서 끝까지 비타협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여줬던 민중(民衆)이 그 주체가 되지 못함으로써 처음부터 3.1운동은 한계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33인이 스스로가 아니라 외세, 즉 일본·미국 등이 알아서 우리의 독립을 선물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타협적·의타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 이후 일제의 지속적이고 잔인한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고, 그 결과 당초의 독립 쟁취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렸다는 사실이다. 3.1운동 이후 민족이 자주적으로 해방될 수 없다는 패배 인식이 확산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3.1운동 이후 선구자들에 의한 민중의 민족적·계급적 각성이 촉구되기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그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도 형성되었다.

  저명한 역사학자‘E.H.Carr’는 그의 저서‘역사란 무엇인가?’에서"역사란 모름지기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의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렇지만 남·북 대치상황 속에서 선대들이 갈망했던 민주공화주의 이념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념적 갈등 속에서 남남갈등 또한 예측을 불허하고 있다. 이미 두 동강이 난듯하다. 외세에 의존한 평화체제 구축에 나라의 명운을 걸고 있으나 우리의 기대가 충족될 것인지 여부는 예단하기 쉽지 않다. ‘항일(抗日)’의 대상이었던 일본 또한 여전히 외교적·경제적·정치적으로 세계 강국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늬 ‘항일’ 내지‘반일(反日)’의 기치는 매우 요란하나 역부족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현세대와 미래세대가 100년 전 선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힘을 합하여 옹골차게 반드시 성취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것은 ‘극일(克日)’을 위하여 함께 매진하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장기적 마스터플랜을 만들어 놓고 국민을 향하여 극일하기 위한‘국운융성의 길’로 함께 가자고 목청 높이는 향도(嚮導)는 크게 드러나 있지 않다. 대신 보수와 진보 이념에 사로잡힌 채, 혼돈을 배가하면서 ‘극일’보다는 ‘반일’의 소리만 요란하다.

어떻든 다시는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학수고대 한다. 이런 대의명분을 이루는 데는‘극일’을 위한 국민 총의(總意)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반일’보다는‘극일’이 국정최우선과제로 부각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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