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제주 현존 대표적인 청동기 유적
대정읍 상모리 유적
공렬토기 사용집단 들어와
소규모 마을조성. 農耕도

 

제주의 청동기시대는 한마디로 토기를 만들 줄 아는 집단이 들어온 것이다. 제주는 대정읍 상모리에서 청동기문화 유적이 확인된 이래 무문토기시대로 불려 왔다. 이는 한반도 중·남부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제주의 청동기문화가 형성됐으나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는 특징을 반영한 시대개념이다.

대정읍 상모리 주변 해안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상모리패총유적은 상모리 유물산포지구와 함께 한반도의 마지막 청동기문화 단계를 보여주는 패총이다. 원래는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공렬토기 집단이 해양문화로 전환되는 모습을 나타내는 유적으로 제주에 현존하는 청동기시대 유적을 대표한다.

상모리 패총과 야외 주거지 발굴로 1년 내내 농경과 어로 수렵을 겸할 수 있는 혼합 생계 방식의 존재가 확인됐다. 따라서 상모리 유적은 제주도에 일정한 집단의 인구가 본격적으로 정착해 마을을 구성한 증거로 볼 수 있다.

 

상모리식 토기의 출현은 제주에 새로운 집단이 들어왔음을 뜻한다. 이 토기와 점토띠 토기는 토기의 형식과 속성 뿐 아니라, 석기와 토기군의 갖춤새 수준에서 유사하다. 이 점은 두 양식의 토기 집단이 동일 주민 집단임을 입증한다.

남한 지방의 민무늬 토기 문화의 변천 과정을 통해 대체로 기원전 6~4세기경 남해안 지방에서 유입한 주민 집단이 상모리식 토기 집단이 되는 셈이다. 남해안 지방 문화의 흔적을 남길 정도로 일정 규모 이상의 주민 집단이 이 시기에 이동해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주도 공렬 토기 사용 집단은 남해안 중서부 지방에서 유입됐다. 집단은 제주도의 적응 과정에서 어로와 수렵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농경의 미미한 흔적도 확인된다. 이 유입 집단은 고인돌을 축조할 만한 인구 집단을 가지지는 못했으나, 소규모 마을을 조성해 생활했다.

제주도에서 공렬토기 문화가 종말을 고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가는 시기는 남한 지방보다 훨씬 늦어 대체로 기원전 2세기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크다.

공렬토기 단계의 한천변 유적은 지금의 용담동 용문로 유적과 월성로 유적에서 확인된다. 특히 다음 시기에 거론될 용담동 옹관·석곽묘 복합 무덤의 가운데 경계 석렬의 남쪽 부분에서 3단계 공렬토기가 부장된 3기의 석곽묘가 확인된 바 있다. 이는 일정한 규모의 집단이 탐라 전기의 곽지리식 토기 집단 이전에 용담동 한천변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다.

3단계 공렬토기 소멸 단계는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중반경에 제주도로 점토띠 토기 집단이 유입 되면서다. 제주시의 용담동·삼양동·외도동 지역을 통해 이 집단이 정주 집단으로서 크게 성장한 증거가 확인된다. 이 시기 이후의 고대 마을은 일정한 인구 규모와 면적을 가진 부족 사회의 구조를 갖춘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고재원 원장은 제주도 민무늬 토기의 전개 양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제주도 민무늬 토기 문화의 형성은 상모리 유적과 김녕리 패총 유적으로 보이는데 그 선후 관계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두 집단이 모두 농경을 기반으로 한 집단으로 주거지와 같은 유구 또는 비교 대상의 유물이 확인되어야 선후 관계 및 생계 유형 또는 사회 구조를 알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힌바 있다.

상모리 토기 문화는 농경을 기반으로 한 흔암리 유형의 토기 문화가 제주에 정착하면서 어로와 수렵·채집 중심의 생계 유형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반면 김녕리 패총은 역삼동 유형의 토기 문화로 볼 때 농경을 기반으로 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김경주 부원장은 “상모리 유적은 제주도에서 가장 빠른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88년도 이후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서 자료가 증가하지는 않았다”며 “최근 절대연대 측정을 했더니 과거 조사(기원전6~7세기)와는 다르게 기원전 10~11세기로 나오고 있어 이때쯤에 상모리 유적이 형성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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