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주 C&C 국토개발연구소장
백승주 C&C 국토개발연구소장

 

16세기 이후 처음으로 아시아지역에 기독교 전파와 무역거래, 그리고 식민지 건설 목적으로 활동한 서양세력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중국과 일본에 접근하면서, 이들은 경쟁했고, 기독교선교 때문에 서로 다투었다. 그 뒤로는 유럽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후로는 네덜란드인들이 주로 동아시아를 찾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 동안 난립했던 무역회사를 통합하여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아시아무역을 독점하였다. 1604년 네덜란드가 명나라와 무역을 희망했으나 거절당하자 그 상대를 일본으로 변경했고 일본은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면서 새로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은둔의 나라 조선은 서양인의 활동과 인식권 밖에 있었다. 산업억제책으로 상업은 발전되지 못했고, 서양인과의 접촉기회 조차 없었다. 우연히 네덜란드 상선이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기착하는 일들이 있었으나 고루한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이들을 억류·추방하기 일쑤였다.

하멜표류기에 의하면 1653815일에 네델란드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대만 경유하여 일본 나가사키(長崎)항해 중 제주 앞바다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난파되어 배 안에 물이 스며들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선원들은 짐과 돛대마저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한 선원이육지가 보인다고 외쳤는데 그 곳이 바로 제주 대정현(大靜縣) 차귀진(遮歸鎭) 아래 대야수(大也水)였다. 선원 64명 중 생존자 36명이 중상을 입은 채로 여기에 상륙했다.

생존자들은 즉시 한양으로 이송되어 2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다 16563월에 전라도로 거처를 옮겼다. 이들은 분산·수용되어 잡역에 종사하면서 억류생활을 계속했다. 탈출 직전까지 억류생존자 수는 모두 16명이었다. 탈출비밀이 탄로 날까 두려워서 8명만이 16669월에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를 경유 암스테르담에 귀환했다. 나머지 8명도 2년 후에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이런 사실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알렸던 서양인 최초의 문헌으로서 생존 선원 중 하멜이 쓴 이른바하멜표류기에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를 통해 조선이 서양에 알려지면서 당시 유럽인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하멜표류기는 제1부 난파와 표류에 관한 기술 부분, 2부 조선왕국기(朝鮮王國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난파와 표류에 관하여 기술돼 있고, 2부에서는 조선왕국기(朝鮮王國記)를 기술하고 있다. 2부에서는 조선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풍속·종교·교육·교역 등을 소개하면서 특히 조선 특산품으로서 인삼을 기술함으로써 서양에 최초로 인삼이 소개되기도 했다. 물론 구체적 제주소개는 없는 듯하다.

이런 사실에 기초하여 19801012일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미래지향적 우호증진 차원에서 각각 1만 달러씩을 출연(出捐)하여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을 하멜일행의 상륙지점으로 하여 하멜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최근 필자의 공향 신도2리 리민과 향우회 등이 십시일반 갹출하여대정읍 신로2리 해안에 하멜일행을 기리는 위령비를 건립했고, 해마다 이곳에서 위령제를 올리면서 하멜일행 기착지에 대한 논란이 재현된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첫째로 조선 태종 16년에 제주행정을 삼읍 체제 즉, 제주 목·대정 현(大靜縣정의 현으로 편재했던 점, 둘째로 조선후기 지리서인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 대정현의 사방경계를 동쪽으로는 정의현과의 경계(서귀포시 법환동 까지)까지 57리로 하고, 서쪽으로는 제주목과의 경계(한경면 판포리까지)까지 37리로 기술한 점, 셋째로 대만에서 출발항해할 경우 거리감에 비춰 차귀진 아래 대야수는 현재차귀포구 아래로 해석함이 매우 설득력이 있다는 점, 넷째로 6-70년 전까지도 동구 밖에 사망자 매장 흔적이 발견되었던 점 등에 비춰서 하멜이 차귀진 아래 대야수를 현재의 신도2리 해변으로 상정하여 기술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종전의 예산집행이 수반된 행정적 오류는 반드시 시정되어야한다. 관광객 등의 혼란 방지차원에서 사계해변의 기존시설 철거등 문제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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