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에 위치 적의 연안 정박 살피기 위한 곳
낮엔 연기, 밤엔 불 피워 위급상황 서로 교환

산방연대, 모슬진에 소속돼 서쪽으로 무수연대와 교신했다.

제주는 예로부터 동아시아 해상의 요충지로서 잦은 외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곳곳에 군사시설을 축조하게 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방어 시설로 봉수와 연대가 있다. 봉수는 주로 산 정상에 위치해 바다를 지나는 적의 배를 멀리서 관망하기 위한 시설이었다면 연대는 주로 해안에 위치해 적이 연안에 정박하는 것을 가까이서 살피기 위해 설치됐다. 따라서 제주내 봉수는 주로 오름 정상에 위치하는 반면 연대는 제주의 해안선을 따라 배치돼있다. 위치는 다르지만 기능면에서는 봉수와 연대 모두 적의 침입을 살피던 군사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피워 위급상황을 서로에게 알렸던 것이다. 

원당봉수대터,  동쪽으로 서산봉수대와 서쪽으로 사라봉수대와 교신했다.

△ 평소엔 하나, 적과 교전할 때는 다섯 개 봉화
 
우리나라의 봉화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유사’에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 봉화를 사용했다는 내용이다. 제주의 봉화 기록은 1439년(세종 21년)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봉화 후망은 22개소이고, 봉군은 봉화마다 5명이며,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 10척’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이미 도내 봉수 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1510년(중종 5년) 제주목사 장림의 건의에 의해 연대를 둘 수 있는 곳에 후망을 더 가설했는데 그 결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25곳의 봉수와 38곳의 연대가 자리 잡았다. 1702년(숙종 28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 ‘남환박물’에 따르면 평상시에는 한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개, 적이 우리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적과 교전하면 5개의 불 또는 연기를 피운다. 또 구름이나 안개로 어두운 때는 군사가 직접 뛰어가 입으로 전달했다. 또 봉수와 연대의 주변 백보내에는 봉화의 오인을 막기 위해 무당이나 통속적인 잡신제를 일체 금지했다.

 

연대는 석축 위에 불이나 연기를 피울 수 있도록 설비했다.

△ 봉수와 연대는 엄연히 다른 형태

많은 이들이 봉수와 연대를 통칭해서 봉수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둘은 엄연히 형태가 다르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석축 형태가 아닌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봉덕시설을 한 뒤 밑으로는 배수시설로 도량을 만들었다. 이와 달리 연대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방형과 둥근 원형, 타원형 형태인 석축으로 축조됐다. 석축 위에는 불이나 연기를 피울 수 있도록 설비했다.  제주 해안에서 볼 수 있는 석출물들은 대부분 복원된 연대고 봉수의 경우 터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당시 제주 곳곳에 봉수와 연대가 고루 위치하고 있었다. 제주읍성에 10개의 봉수와 18개 연대, 정의현에 10개 봉수와 11개 연대, 대정현에 5개 봉수와 9개 연대가 있었다.  각 봉수에는 6명의 별장을 뒀고 그 밑으로 24명~36명의 봉군을 배치해 1개월에 5일씩 순환 근무를 했다. 이들은 모두 봉수가 위치한 지역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선정됐다. 

탐라순력도 중 수산성조, 1702년(숙종 28년) 수산진에 소속된 성정군의 훈련과 주변의 수산봉수, 협자연대와 구구산 고성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다.

△ 제대로 된 고증 거치지 않아 엉터리 복원

제주의 38연대 중에서 제주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것은 모두 23개이다. 그러나 이들 중 고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복원된 연대가 많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더군다나 봉수는 보호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어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곳이 많다. 제주도내 봉수 절반가량이 훼손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나타났다. 외세로부터 제주를 지켜냈던 군 통신망 연대와 봉수에 대해 도민들의 많은 관심과 역사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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