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총 4차례
전국 시민 대상 제주4·3 평화기행
17일 1차 기행…관련 유적지 답사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70주년을 맞은 작년부터 매년 전국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제주4·3 평화기행을 마련한다. 4·3은 무엇인지, 타 도시 사람들은 제주 4·3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1박 2일 동행 취재해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김석호의 1녀, 김석호의 2녀’

이름도 없이 죽은 어린 아이들의 위패를 보고 4·3의 무게를 실감했다.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 안, 이름이 없는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에 덧붙여 위패를 봉안했다. 일제 해방 이후 제주는 5세 이전에는 이름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이름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야 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4·3 71주년을 맞아 전국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제주4·3 평화기행을 기획했다. 이달 17일을 시작으로 7월, 10월, 11월까지 총 4차례, 35명씩 1박 2일 동안 진행된다.

1차 기행으로 전국에서 온 참가자들이 17일 오전 10시 공항에서 만났다. 호우·강풍 예보에도 참가자들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인사를 나누며 버스에 올랐다.

참가자들은 관덕정에 앉아 김성용 제주4·3문화해설사회 회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4·3은 예 경찰청이 있던 제주목관아지와 관덕정에서 시작됐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3.1기념식 후 해산하던 중 기마경찰 말발굽에 아이가 차인다. 다친 아이를 두고 지나치는 경찰을 시민들이 사과를 요구하며 쫓는다. 경찰청 앞에 군중이 모이고 이 중에서 6명이 경찰의 사격으로 죽는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 민·관은 3월 10일 총파업에 돌입한다.

일제 해방 후 우리나라는 미군정 치하에 있었다. 미군정은 3월 13일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하고 파업의 원인을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또 ‘제주도민 70%가 좌익에 동조자’라 했다.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 즉 ‘빨갱이 섬’으로 단정한 것이다. 다음날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경찰 421명이 급파됐다. 당시 제주에는 330명의 경찰이 있었다. 이후 테러와 고문 등 강경한 탄압으로 3000여명이 구금된다. 중학생 포함한 3명이 더 죽자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는 무장봉기한다.

어처구니없는 4·3의 시작을 듣고 곤을동 마을로 이동했다. 우산이 뒤집어지는 비바람을 뚫고 도착한 곤을동 마을은 제주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한적하고 버찌가 빨갛게 익어가는 아름다운 풍광을 지녔다.

제주에는 4·3으로 주민과 주택이 모두 불타 없어진 마을이 총 109곳 있다. 이를 ‘잃어버린 마을’이라 하고 곤을동 마을도 그 중 하나다. 낮은 산등성이를 등지고 계단식으로 43호의 집들이 있었다. 1949년 1월 이틀 동안 마을 주민과 집이 모두 불타고 지금은 돌담만 남았다. 당시 처참함을 기록한 안내판이 없었다면 돌담이 아름다운 바닷가로 알았을 것이다.

4·3평화기념관에 도착해 묵념 후 위패봉안실에 들었다. 전면을 가득 채운 위패를 보자 참가자들은 탄식했다. 3만여 명의 사상자 중 확인된 1만4000여명의 희생자의 위패만 모셔졌다. 매년 추가로 희생자를 선별하고 이들의 위패는 구분해서 따로 모시고 있다.

“무장대와 토벌대가 같이 묻히는 것 아닙니까?” 한 참가자가 질문하자 김 회장은 수차례 검증을 통해 무장대는 제외한다고 답했다.

희생자의 숫자는 무의미하다. 얼마나 많은지 실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억울한 죽음에 참가자들은 숙연해졌다.

위패봉안실을 나와 행방불명희생자 표석을 향했다. 이 곳은 희생자 중 시신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4·3으로 형을 받으면 형량에 따라 다른 곳으로 보냈다. 5년 형이면 목포와 부산. 10년이면 대구, 대전으로 15년이면 마포, 인천 형무소에 수감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4000여명이 총살·암매장 돼 시신을 찾지 못한 것이다.

스산한 마음을 안고 희생자 모녀의 기념 조각인 ‘비설’로 갔다. 나선형 돌담을 따라 내려가면 흰 대리석 위에 검은 모녀가 쓰러지는 조각이 있다. 눈밭에 난 맨발의 발자국이 그날의 다급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1949년 1월 6일 봉개동 지역에서 군인에게 쫓겨 사살된 젖먹이 딸과 엄마이다. 이듬해 봄에 발견된 이들의 넋을 기려 변병생 작가가 만들었다. 돌아 나오는 돌담에 자장가 ‘웡이자랑’이 새겨있다. 사투리를 몰라도, 젖먹이를 안고 죽은 엄마의 마음이 더해져 울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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