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배운다’는 측면에서 보면 ‘즐거움’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논어(論語)의 첫 구절도 배움의 즐거움을 담고 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느냐(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움의 기준이 되는 진리의 잣대는 세계관에 따라 다르다. 공자(孔子)는 그것을 인(仁)이라 했다. 그것을 달리 해석하면 사랑함이다. 그리고 사람됨이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사람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곧 학문(學文)이다.

▶문(文)은 시예악역춘추(詩禮樂易春秋)다. 그것에는 각기 씀씀이가 따로 있다.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시(詩)를 배워야 한다. 사람의 행실을 배우기 위해서는 예(禮)를 알아야 한다. 사람의 화합을 배우기 위해서는 악(樂)을 알아야 한다. 하늘과 땅의 움직임을 알기 위해서는 역(易)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다스림을 알기 위해서는 춘추(春秋)를 배워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그것을 배우면 기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학이시습(學而時習)은 ‘나를 닦는다(修己)’는 뜻일 때 더욱 의미가 있다. ‘나를 닦는다’는 의미는 ‘나를 배운다’는 뜻이다. 그것에도 전개과정이 따로 있다. ‘대학(大學)’이 그것을 밝혀 준다. 이것 역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구절이다. ‘나를 닦은 다음 집안을 다스린다. 집안을 다스린 다음 나라를 다스린다. 나라를 다스린 다음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나를 닦는 일’이 그 근본이다.

이것은 배움의 확대다. 물론 그 기준은 인(仁)이다. 나를 닦는 것도 바로 사랑함이다. 집안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도 모두 사랑함이다. 결국 사랑함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이다.

▶오늘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한 정당과, 한 국회의원 사이에 ‘공부하라’는 공방이 눈꼴사납기 때문이다. 말투로 봐서는 공부로 배움의 즐거움을 즐기라는 덕담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정치적 수사라 하지만, 듣기 거북하다.

 우선 서로 ‘공부하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 ‘나를 배운다’는 의미를 실천함이 어떨까. 나를 배우지 못하면, 아무리 학식이 높은들, 높은 자리에 앉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무리 막말을 하는 정치 판이라 하지만, 교만한 말투는 삼갔으면 한다. 자라는 아이들이 본을 볼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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