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학졸업자의 절반은 대학 전공과 관계없는 직업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대졸 취업자 절반은 사실상 4년전의 고졸 혹은 독학 실력으로 사회에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굉장히 충격적인 통계인데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9일 <전공 선택의 관점에서 본 대졸 노동시장 ‘미스매치’와 개선방향>이라는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전문대졸 이상 25∼34세 임금근로자 중 50%는 전공과 직업이 무관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한국의 이런 불일치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다른 OECD 국가는 평균 30%대다.

KDI는 대학의 정원 규제가 학생들이 직업과 관계없는 전공을 선택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수도권 대학의 경우 수도권 쏠림 방지를 위해 총원이 정해져 있다 보니 전공별 정원 조정이 쉽지 않아 학생들의 전공수요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이 보고서는 “대학이 서열화 돼 있어 수도권 소재 대학으로 학생들이 몰리고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원하는 전공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대학의 서열화가 ‘미스매치’라는 후과를 불러왔다는 것인데 정부나 대학의 노력과 투자, 학생 자신의 재정적인 부담과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정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대학은 대학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그 긴 시간 ‘헛짓’을 하며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본인이 직업으로 갖고자 하는 분야의 소양과 직무역량을 키우기 위해 갖은 애를 써도 모자랄 판에 억지전공, 한눈팔이로 4년을 허송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건 난센스다. 이들에게 대학 졸업장은 ‘목적한 대로’ 장식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 KDI가 2018년 전국 4년제 대학 신입생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전공을 바꾸고 싶다고 응답한 비중은 28.2%였다.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자신의 성향과 무관하게 문과 또는 이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한다는 응답도 37%에 이르렀다.

보고서는 이런 ‘미스매치’를 없애려면 수도권 대학의 총량적 정원 규제를 완화하고 학생의 전공 선택 시점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놨다.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정곡을 찌르는 해법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간판주의’내지는 ‘일류병’이다. 국민들 스스로가 만들고 그 스스로 노예가 되는 이 아이러니를 타파해야 한다.

‘간판주의’로 야기되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학력(學歷)이 아니라 실력(實力)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간판’ 대신 본인이 좋아하는 전공을 택하고, 각계 직업이 존중받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간판’이 한 사람의 인품이나 실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서열화를 막는 교육정책이 시급하다. 프랑스가 좋은 예다. 우리도 연합대학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1대학, 한국2대학, 한국n대학 식으로. 약대나 의대의 예가 참고가 될 수 있다. 약사나 의사, 간호사의 경우 그의 성취나 현장실력이 중요하지 출신학교 즉, ‘간판’이 그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일류병’ 혹은 ‘간판주의’는 결국은 국민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부질없이 ‘위너’와 ‘루저’의 처지를 반복시키면서 국민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다. 북유럽에서는 의과대 신입생을 추첨으로 선발하는 나라도 있다. 물론 졸업생은 대부분 훌륭한 의사로 육성, 배출된다. ‘간판’을 내세우는 사람도 없지만, 그 때문에 패배의식을 갖거나 열등의식에 시달리는 국민도 없다.

‘간판주의’가 사라지면 우리사회는 훨씬 명랑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가계가 소위 교육비라는 이름으로 쏟아 부었던 에너지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쓰일 것이다. 적재적소에 인재들이 고루 순리대로 자리하면서 국민들의 행복도가 올라가고 국가발전도 한걸음 빨라질 것이다. ‘간판주의’는 기필코 빠져나와야 할 수렁이다. ‘미스매치’는 바로 병든 사회의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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