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덕목은 겸손과 是是非非

'지지위지지(知之謂知之) 부지위부지(不知謂不知) 시지야(是知也)'.
풀이하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것"이라는 뜻일 터이다.

조선시대 문인 유목인(柳夢寅)이 "조선사람들 경서(經書)나 읽을 줄 아냐"고 업신여기는 중국 사신에게 "조선에서는 새들도 경서 하나쯤은 읽을 줄 안다"며 인용한 구절이다.
'논어의 위정(爲政)편'에 나온다.

새소리와 음이 비슷한 논어 구절을 인용하여 교만한 중국 사신에게 한방 날린 것이다.
함께 인용한 '순자의 수신(修身)편' 구절도 새가 지저귀는 소리 '지지배배'와 흡사하다.
'시시비비 위지지(是是非非 謂之知) 비시시비 위지우(非是是非 謂之愚)'.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며 그른 것을 옳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풀이가 가능하다.

공교롭게도 인용된 두 구절 모두 지적(知的) 판단 능력에 관한 담론이다. 그것은 바로 선비의 덕목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새 소리와 선비. 참으로 절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선비사회의 콘텐츠라 아니할 수 없다.
첫 번 인용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선비의 겸손을 강조한 것이라면 뒤의 것은 옳고 그름을 가려 세상을 바르게 경륜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절개 푸른 지식인 보기 힘들다

선비라 불리었던 옛 시대 지식인은 의(義)를 중히 여기고 올곧게 절개를 지켰었다. 도덕적 원칙을 소중한 가치로 삼아왔다.

아무리 어려워도 분수를 지키며 가외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 '무욕(無慾)의 삶'을 엮었던 것이다.

청빈(淸貧)이 그들의 겉옷이었으며 안빈낙도(安貧樂道)가 그들의 이부자리였다. 거기에서 맑은 영혼을 걸러 낼 수 있었다. 대쪽같이 곧고 푸른 절개를 키울 수가 있었다.

지식인의 역할은 갈고 닦은 학자적 양심으로 권력의 잘목을 비판하고 약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데 있다. 그래서 보편적 진리를 끌어 모아 사회 안전망 구축에 앞장서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눈 들어 살펴봐도 정의의 편에서 절개를 세우고 불의한 사회현상을 질타하는 지식인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권력에 빌붙어 그들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지식용병들의 날개 짓만 보일 뿐이다.
권력과의 비굴한 입맞춤을 통해 권력의 단물만 핥으려는 '일부 정치교수'들 때문에 나오는 소리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이들 '정치교수'들의 행태를 보노라면 실망과 체념의 수준을 넘어 분노와 증오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권력.명예만 탐하는 정치교수

소위 정치교수들은 학문에는 관심이 없다. 대학교수직을 아르바이트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대학교수라는 직함은 권력과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이용되는 발판일 뿐이다.
정치를 빌미로 마음대로 강의를 쉬고 또 마음대로 강단에 복귀 할 수 있다. 시쳇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다.

물론 위법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법의 문제가 아니고 양심의 문제다.
그러나 이들에게 "학자적 양심 운운"은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일 뿐이다.
최근 제주에서도 '정치교수'들의 일탈을 질책하는 소리가 높다.

지난 수년간 권력의 양지에서 단물만 배급받던 소위 정치교수들이 아직도 기득권에 매달려 또 다른 권력의 열매를 탐하고 있다는 소리가 그것이다.

제주발전을 컨셉트로 한 도책(道策)연구기관의 장(長)에 이들이 기웃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선거법 위반으로 지사직을 상실한 전직 지사의 선거운동을 도와 선거법 위반 사건에 연루됐던 두 교수가 전직 지사 재임시 그 자리에 추천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터져 나오는 비판과 냉소는 더욱 싸늘하다.

물론 사회발전을 선도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봉사는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시계추처럼 정치와 대학을 왔다갔다하는 정치교수들을 위한 변명일 수는 없다.
정치를 하려면 대학을 떠나야 옳은 일이다. 그들의 빈자리에는 고매한 석학들이 줄을 섰다. 이들을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옳고 그름'을 변별해 낼 수 있는 지식인 사회의 곱고 맑은 새소리가 듣고 싶다.
"지지배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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