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시인   현   춘   식

  예로부터 제주도에는 목축업이 성행했다.  중산간 지대에 목장지대가 펼쳐져 마을 소유의 공동목장들이 있다.  역사속에는 나라에서 감목관 제도를 두고 군마를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들녁에는 겨울동안의 사료를 베어 내는 촐왓도 많았다.  농사도 우마를 이용했다. 

겨울에는 우마를 집에 있는 쇠막에서 촐을 주며 사육했다.  하지만 새풀이 돋는 봄에서 초가을까지는 들판이나 목장에서 풀을 먹였다.

  이 우마들을 돌보는 사람을 ‘테우리’라고 한다.  ‘테우리’는 ‘牧者’ 또는 ‘牧童’의 제주도 말이다.  ‘테우리’는 말과 소를 관리 감시하는 사람이다.  우마가 있는 집집마다 각자가 기를 수 없는 노릇이기에 이를 전업으로 삼는 ‘테우리’에게 삯을 주고 사육을 의뢰했다. 

우마의 관리 감시 책임을 의뢰 받은 ‘테우리’는 마소를 잘 먹이고 관리하는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기 마련이다.  그 가족은 여나문살의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낮에는 우마를 몰고 산야를 돌아다니며 풀을 먹인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돌담을 두룬 목야지에 몰아 넣어서 관리했다. 

  이런 과정에서 우마를 잃어버리면 ‘테우리’가 책임지게 된다.  그러나 큰 비 등 천재지변으로 우마를 잃어 버렸을 때는 그 책임을 면했다.  그래도 ‘테우리’ 입장에서는 감시의 눈을 조금도 게을리 할 수 없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다가 한 두 마리라도 이탈하면 재빨리 달려가서 되몰아 와야 했다.  우마떼 중에는 꼭 말썽꾸러기가 있기 때문이다.  ‘테우리’는 방심하다가는 그만큼 대가를 치른다.  그리고 다른 우마떼를 만나는 날이면 마소들이 서로 뒤섞여 아수라장을 이룬다. 

양쪽 ‘테우리’들이 우마를 구별해 내고 다른 데로 몰아가서 풀을 먹어야만 했다.  이러한 우마떼들을 몰고 오는 정경은 제주만의 아름다운 풍물이었다.  영주10경의 하나인 ‘고수목마’가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  세월은 흘러 우마떼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두 눈을 번득이며 감시 관리하던 ‘테우리’도 사라졌다.

  세상만사가 새옹지마라 했던가.  사람들이 우마떼처럼 몰래 감시당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현대판 사람 ‘테우리’인 몰래 카메라가 사방에서 눈을 부라리며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산불이 많이 나는 봄철이면 높은 오름의 보초막에서 방화범을 감시하는 망원경이 사방을 살핀다. 

하늘에선 인공위성의 카메라가 지구촌의 움직임을 낱낱이 감시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선 더 많은 몰래 카메라들이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다.  자가용을 몰고 가다 기분을 낸답시고 ‘액셀러레이터’를 좀더 밟았다가는 여지없이 과속단속 몰래 카메라에 걸려 든다.

  공공장소라고 해도 안심은 금물이다.  보안 시스템의 강화로 곳곳마다 감시카메라가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의심받을 행동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아파트 집을 드나드는 엘리베이터에도 예외는 아니다. 

 ‘ CCTV 감시중’이라는 경고문을 보면 괜스레 기분이 잡치게 마련이다.  은행도 ‘무장경관 근무’라는 경고문에 몰래 카메라 감시는 여전하다.  서점에서도, 편의점에서도, 할인점에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몰래 카메라의 감시 대상이 되고 만다. 

심지어는 목욕탕이나 화장실에도 음흉한 의도의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놓아 사회적 물의를 야기시킬 때도 있다.  선거판이 벌어지면 불법선거 운동을 감시한답시고 카메라 폰이 춤추는 사회가 되고 말았으니 더 말해봐야 주둥이만 아플 일이다. 

보안과 안전을 위해서라니 감시당하고 찍혀도 유구무언이다.  사람들이 우마떼 신세가 되어 감시당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쩌랴.  그저 삼가 할 수 밖에 별도리 있겠는가.  ‘열 사람 눈 부룹 떠도 도둑 한 놈 못 잡는다’는 옛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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