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의제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고령사회로의 진입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사회 변화의 대표적 현상이다.

따라서 노인문제는 중요하고도 심각한 사회적 또는 국가적 의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로서는 더욱 그렇다.

UN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7%가 넘으면 ‘고령화 사회’, 14%이상이면 ‘고령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2000년을 기점으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여 2003년 3월 현재 65세 인구비율이 8%를 넘어섰다. 제주는 이미 9%를 상회했다. 오는 2019년에는 14%를 넘어 ‘고령사회’로 들어설 전망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로의 진입이 프랑스에서는 115년, 스웨덴에서는 85년이 걸렸다는데 우리나라는 20년도 채 안 걸릴 것 같은 고속 진행이다.

그렇지 않아도 “건강하게 잘 살자”는 이른바 웰빙(well being)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그렇다면 평균수명은 더 늘어 날 터이다. 고령층은 더 두텁게 형성될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고령사회에 대비한 사회적 안정망은 보이질 않는다. 이를 수용할 문화적 코드도 없다.

상실의 시대에 방황하는 노년

고령사회의 중요한 테마는 “노인들이 얼마나 더 오래 사느냐”는 데 있지 않다. “어떻게 아름답게 사느냐”가 노인문화의 스펙트럼이다. 건강과 행복의 문제다. 생산적 사회참여가 핵심이다.

그렇지만 요즘 60대 이상 노년세대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소외와 상실감은 의외로 심각하다.

‘사오정’ ‘오륙도’ 등 생물학적 활동능력에 관계없이 진행되는 조기퇴직 여파와 젊은 세대와의 단절감까지 겹쳐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스트레스를 풀 마땅한 위안거리가 없다. 향유해야 할 문화적 프리즘도 보이지 않는다.

100원 짜리 고스톱이나 막걸리 한잔 내기 장기.바둑으로 상징되는 ‘노인정 문화’가 고작이다.

최근 요가나 스포츠 댄스.게이트 볼 등 ‘웰빙 문화’가 유행을 타고 있지만 그들의 소외감이나 단절감은 어쩔수 없다.

그렇다면 왜 혁대 졸라매며 피땀 흘려 오늘의 국부(國富)를 일궈낸 노년세대들이 단절되고 소외된 상실의 시대에서 주눅들어야 하는가.

노년층을 그저 하릴없는 소비계층으로만 보려는 빗나간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퇴출대상으로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보편적 트랜드가 사회일반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국가 지도자를 꿈꾸는 50대 정치인이 앞으로 오게될 자신의 늙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노인 폄훼 발언을 했다가 혼쭐났던 사례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나이의 늙음은 문제가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당연한 명제다. 오늘 방방 뛰던 젊음은 내일이면 기진한 노년이 된다. 모든 살아 숨쉬는 것들의 숙명이다. 오늘 황혼을 바라보는 늙음도 어제는 싱싱하고 팔팔한 젊음이었다.

따라서 노년은 오늘과 내일을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문제다. ‘고령사회’의 문제풀이는 여기서 출발해야한다. 세대의 벽을 뛰어 넘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노년의 지혜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다. 그들의 경험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노년의 지혜는 삶의 윤활유다. 역경으로 엮어온 그들의 경험은 사회적 안전벨트나 다름없다. 풍부한 경험을 통해 다듬어진 지혜는 그래서 사회발전의 추동력이다. 든든한 버팀목이다.

노인들이 고령사회의 주역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할 당위가 여기에 있다. 나이의 늙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각의 낡음이 문제다. 준비하는 노년은 아름답다.
따라서 이들의 경험과 지혜를 활용하는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고령사회’를 예비하는 대안이다.

이를 바탕으로 생산적이고 사회 통합적인 ‘고령사회 정책개발’이 마련된다면 다가오는 고령사회는 더 튼실하고 더 포근해질 것이다.

‘노동의 종말’을 쓴 미국의 세계적 행동주의 철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문명의 마지막 코스는 고령사회(aging society)를 대비하는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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