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정의의 실현이다. 개인의 이해와 친선을 강화하는 사랑의 결실이다. 정의가 없는 곳에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정의는 자연에서 살아 숨쉰다. '자연에 대한 인간 지배'의 사회적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다.

 나는 '평화의 섬'도 생태적으로 사고(思考)하길 기대한다. 지역사회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연과의 평화가 이뤄져야 한다. 자연을 파괴하는 자기 확장의 가공할 원리 앞에 진정한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개인의 차원을 따지거나, 사회적 현실을 들먹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생명의 존재가치를 존중하는 생명문화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단순한 정치적·지정학적 개념은 생명권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한낱 신화일 뿐이다.

                  새로운 환경 윤리의 필요성

 더 이상 군말은 필요 없다. 생명 존중은 곧 피조물의 보존이다. 진정한 평화는 자연 생명의 보호에 입각해야 한다. 오늘날처럼 기술문명의 발달로 자연환경이 오염된 상황에서는 생태계의 보호 없이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자연을 오로지 경제적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개발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곳에서는 미적 가치는 설자리가 없고, 그런 곳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쩔 수 없이 그 끝없는 탐욕 앞에 우리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는 그 끝없는 탐욕을 억제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어찌 여기에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태계의 위기가 바로 도덕의 타락에서 비롯된 부정적 산물이지 않던가.
 자연을 향한 그 끝없는 탐욕을 억제하는 '금욕의 문화'부터 다듬어 나가야 한다.

끊임없는 권력지향의 의지를 억제하고, 절제와 겸양을 아는 문화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개발양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평화의 섬'의 이미지마저 개발이라는 모호한 신념으로 위장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의식의 성숙이 따르지 않은 진보는 파국을 불러온다.

 나의 주문은 또다시 이어진다. '평화의 섬' 선언에 앞서 '새로운 환경 윤리'를 구상해야 한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환경 윤리의 으뜸은 '자연에 대한 경외(敬畏)'다. 자연의 환경 윤리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인간과 다른 생명을 포함한 전체적 유기체로 자연을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인간과 다른 생명이 함께 속해 있다는 책임을 고려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요구하는 환경 윤리의 얼개다.

                   인간 支配가 자연 支配를 초래

 그러나 나의 생각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인간 상호간의 평화가 성립되지 않을 때 자연과의 평화는 있을 수 없으며,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가 '자연에 대한 인간 지배'를 초래한다는 그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다.

 근로자의 정당한 주장이 묵살되고, 그리하여 피켓을 들 수밖에 없는 갈등현장에서 무조건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조금만 잘 나가는 듯하면 뒤에서 끌어당기고, 음해적인 투서와 모함이 난무하는 한 평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결코 거창하지 않다. 평화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들이 채워진 상태'일 뿐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사람을 경시하는 것은 평화를 파괴하는 분쟁의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은 공동체 형성의 타당성과 지속성을 정당화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재로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인간을 전제로 삼고 있다. 나와 타인의 관계를 바르게 설정해야 한다. 나와 타인의 관계가 지배적일 때 자연에 대한 지배는 필연적이다.

 '평화의 섬'을 선언하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말이다. 무모한 개발로 자연이 파괴되고 생존을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그것은 자칫 사치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평화의 섬' 개념에 숨어 있는 퇴폐성을 한번쯤 눈여겨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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