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이나 단체에 소속하면서 그들의 상관이나 리더를 향해 잘못을 지적하고 직언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더구나 왕이나 대통령의 경우 더욱 그렇다. 조선조에서 상소도 한 유형인데 이로 인해 귀양을 가던가 죽음까지 당한 예는 많다.

▶당나라 명신 위징(魏徵:580∼643)은 중국사상 직언을 제일 잘한 신하로 꼽힌다. 당태종의 왕권쟁탈에서 원자인 태자 편에 섰던 위징은 태자동생 세민의 승리로 왕권을 장악 태종이 되었는데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되어 정국공에까지 승진한 인물이다.

이런데도 태종에게 충간을 하여 미움과 총애를 고루 받았다. 역사는 그를 당나라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와 함께 당나라의 3걸(傑)로 평가하고있다. 당시 황제에게 미움을 받으면 즉결처분을 내릴 수 있는 두려운 어전에서 그 많은 직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목숨을 초월한 결단이다.

그가 직언을 한 기준은 어진 정치, 군 동원억제, 사치금지, 예의와 교육의 존중에 두었다고 한다. 임금이 이 원칙에 반했을 때는 서슴없이 상소를 했는데 그 수가 수 십 차례였다고 한다. 태종도 한번은 지나치다고 보아 위징을 죽이려고 하였다가 그의 간언이 진실임을 깨닫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당태종이 훌륭한 사리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의 상대편에 선 사람을 인재임을 알고 받아드린 도량도 대단하다. ‘예스맨’이 아닌 ‘노’를 잘하는 신하를 통하여 자기성찰을 하였다. 태종 17년 위징이 병사하자 탄식하면서 태종이 평한 말이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바로 할 수 있었고, 옛일을 거울삼아 성쇠를 알 수 있었고 사람을 거울삼아 득실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나는 늘 이 세 거울을 지녀서 내 잘못을 막을 수 있었다.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이 거울이 깨어졌구나’라고 했다.

그 후 고구려군 양만춘 장군의 지휘하는 안시성싸움에서 패하자 회군을 하면서 탄식을 했다.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했을까? 라고… 우리나라엔 지금 젊은 대통령, 새 자치단체장 등 새로운 지도자가 많다. 이들이 말실수, 정책실패, 민의 왜곡, 세력간의 불협화음 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어렵게 얻은 인심을 말한 마디 잘못으로 잃는 실수가 연발하고있다.

▶이런 지도자에게 현대판 위징이 필요한 것 같다. 부하가 자기보다 똑똑하다고 불확실한 정보로 헌신짝 같이 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상대편에 서 있었더라도 정책이 다르다고 코드가 맡지 않다고  인재를 버리고 정책을 실기하고 있지 않은지 물어보고 싶다.

재갈공명의 삼고초려는 필요한 인재는 체면도 버린 인재제일의 고사에서 큰 교훈으로 오늘날에 각인되고있음도 참고가 되는 사실이다. 나 홀로보다 21세기는 시스템이 일을 하는 전문가의 시대에 살고있다.

김 계 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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