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 여러분’ 분명 여기 저기서 나를 찾고 있다. 그러나 웬 뒤틀린 심사인가. 도대체가 동일인 확인의 조건 반사적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쩐지 불안하다. 정녕 우리 정치에도 봄은 오는가. 예보된 태풍을 기다리는 긴장감이 있다. 내일 어느 쪽이 승자가 되든 갈등의 여지는 여전히 남는다. 이긴 쪽은 나름대로 승자의 보상을 요구할지 모른다. 진 쪽은 살아 남기 위해 ‘죽기 살기’로 덤벼들지 모른다.

그래서 모두가 걱정이다. 결과가 어떻든 총선 이후가 불안하다. ‘탄핵 심판’이후가 더욱 걱정스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오늘의 상황에 겸손하지 못하고, 어느 쪽이든 승리를 구가하려들면, 단언컨대 봄은 오지 않는다. 승자와 패자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어떤 정치제도도 일방적일 수 없다. 완전한 조화상태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과 대립 속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 나가느냐 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균형감각을 지닌 정치인을 재생산하는 역사적 힘을 갖지 못했다. 이번도 예외가 아닐 듯 싶다.

정치의 역동성에 초점을 맞출 경우, 어느 쪽이 다수당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치력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 나의 순진함이 아니다.

현실적인 개혁의지는 국회의 과반수 등 제도화된 세력기반을 배경으로 할 때 구체화된다는 일반원리를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다. 협동의 구조물이다. 다수당이 됐다고 하여 모든 것이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정치는 권력과 양심이 만나는 영역이다. 불안정 하지만, 타협을 이루는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제는 도덕적 설득과 합리적 조정에 의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정치가 공론적 토론에 연결되는 행동양식을 보이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어쩐 일인지 우리의 정치인들은 그 정치적 지위만이 자기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정체성에 들어 있는 지적인 원천과 사고(思考)의 원리 등이 그 자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오만을 부른다.

정치적 오만은 나라를 망친다. 오만은 이성(理性)의 마비이며 양심의 혼미다. 인간은 방자할 때 자존망대해지고, 방일할 때 불손해진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양심은 자기 정화의 표현이다. 그것은 ‘자기’가 서 있는 자에게 존재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내가 이야기하는 ‘자기’는 ‘어설픈 소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신이란 합리적 개방성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지나치면 독선이라는 말을 듣는다.

강한 의지로 하려는 자는 그것을 망치고(爲者敗之) 잡고 놓지 않으려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執者失之)는 도덕경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 있다.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

나의 주문은 또 다시 이어진다.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 깨끗하지 못한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개혁은 한마디로 허구다. 스스로 깨끗하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만을 보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양심의 발로임을 자처하면서 진실한 양심의 행동을 욱박지르는 것은 죄악이다.

편가르기는 공통체의 쇠퇴를 촉진한다. 이른바 ‘코드정캄는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킬 뿐이다. 그래서 묵자(墨子)는 친사(親士)편에서 경고한다.

“임금은 가축을 요리할 때나 의복을 지을 때는 솜씨 좋은 요리사나 제봉사를 시켜 만들면서도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연고관계의 사람을 부린다.

만약 그들로 하여금 국가를 다스리게 한다면 곧 지혜도 없는 자들로 하여금 국가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된다. 국가의 혼란은 이미 알 수 있는 일이다” 인용이 장황함은 그만큼 우리의 사정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나의 결론은 자명하다. 바로 염치(廉恥)의 정치다. 청렴하고 깨끗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의 정치다. 그럴 때 총선의 결과는 어느 쪽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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