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말기 5대에 걸쳐 불사이군이란 이은(吏隱)의 도리로 인식하였으나  외형상 변절을 거듭하면서 난세 속에서 승승장구한 신화 같은 인물이 바로 풍도(馮道;882-954)다. 연 나라에서 시작하여 진나라를 거쳐 후당의 재상이 되기까지 5왕조 11임금을 섬긴다.

 이런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행정의 달인으로 행정기술만을 제공한 소신과 신기에 가까운 처세술, 자기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풍도는 성품이 원만하고 박학다식한대다 不偏不黨을 지켜 어려운 시기에 자기의 중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짧은 왕조가 변화된 환경에서 새 정권을 운영하려면 무색무취의 유능한 인물이 필요하고 여기 풍도가 적격이었던 것이다. 민심의 소재를 잘 알고 처방에도 오랜 경륜이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왕권을 장악한 거친 군왕의 심기를 잘 알라서 부드럽게 접견하고 민심수습에도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에 가능했다.

 이 분은 목판인쇄술을 장려 130권의 경서를 간행하는 등 문예부흥에 주력 비 정치성을 보상하는 문화종교사업에도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신간의 유교적인 기본덕목을 어겼다는 인식으로 ‘지조 없는 신하의 상짱으로 각인이 되었다.

 후에 명나라에 와서 풍도를 ‘난세의 병화에서 인민을 구제한 정치갗라는 새로운 평가를 내렸다. 지조를 지켰더라면 악평은 막을 수 있었지만 백성의 편에서 난세에 처한 백성의 희생을 막지는 못 했을 것이란 말이다.

외형상 利敵의 길에 서 있으면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의 희생을  막은 역사는 얼마든지 있다. 병자호란에 김상현의 절의 만큼 최명길의 현실론도  필요했다. 일제식민지청산으로 친일반민족청산으로 민족정기를 바로 새우고있다. 이 문제는 시기를 놓친 역사의 유산이기도 하다.

 역사청산이란 대의를 놓고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변절자나 이적에 대한 바르고 정확한 판단이다. 한족이 원나라의 신하가 되어 한족의 몰살계획을 무산시킨 것, 일제치하에서 친일선상에서 우리백성을 구하고 민족문화창달에 앞장선 것, 광복후의 공적으로 탕감될 대상도 있다. 역사 앞에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국가를 위해 당이나 개인에 우선한 역사적 현재에 얼마나 충실한가도 새겨볼 말이다. 

논설위원  김   계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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