墨子 법의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하늘은 반드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기를 바라며,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서로 해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늘이 아울러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늘을 바탕으로 하여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해야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 묵자의 겸애사상의 참뜻도 여기에 있다.

▶어떤 학자는 묵자의 하늘의 뜻을 ‘백성의 뜻으로 해석한다. 묵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복을 빈 것은 살아 있는 천자가 이미 백성의 뜻에 반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저항의 논리가 있다. 그것은 하늘의 섭리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하늘의 도에 어긋나면 서슴없이 폭군으로 판단하고 그에 저항하는 것 역시 하늘의 뜻으로 인정한다. 이 하늘의 뜻이 바로 백성의 뜻이다.

범위를 좁혀 해석하면 백성의 뜻은 ‘주민의 뜻’이다. ‘주민의 뜻’에 반하는 행정은 의미가 없다. 그 어떤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동의의 요소‘로 표현되는 주민의 실질적 참여가 결여된다면, 이미 그 시책은 주민을 위한 시책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때 만일 목적의 정당성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독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실험을 마친 경험이다.

▶주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주민의 뜻이 하늘의 뜻이다. 행정관료 몇몇이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아 시책을 결정해 놓고 무조건 따라오라고 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전문가들에게도 한계가 있다. 솔직히 개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일반 주민보다 오히려 모르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국제자유도시’도, 행정계층 개편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의 정당성은 그것 자체로서 완결되지 않는다. 그것의 형성과정에 주민의 참여가 실질적으로 확보되었느냐는 것을 대전제로 판단해야 한다. 주민의 뜻이 바로 그 정당성의 기초다. 그것은 행정 책임자의 자의적인 판단이나, 일부 전문가의 의견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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