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 우화의 ‘이리와 아기 양’은 절대적 힘을 가진 권력이 때론 얼마나 억지를 피울 수 있는가를 빗댄 얘기다. 목이 말라 개울가를 찾는 이리(권력자)와 여기서 이리가 올 것인 줄도 모르고 순진하게 물장난을 치는 아기 양이 있다.

이리는 물장난을 치는 양에게 “어른이 잡수시는 물에 이렇게 흙탕을 일으켜서야 되느냐”고 트집을 잡는다. 아기 양은 그러나 “아저씨가 물 마시는 곳은 위쪽이고 제가 목욕을 하는 곳은 아래쪽인 여긴데 어떻게 아저씨가 마시는 물을 흐리는 것이냐”고 대든다.

할말은 잃은 이리는 “작년에 ‘심술궂은 이리야’ 욕을 하며 도망친 것은 무슨 까닭이었느냐”고 묻는다. 아기 양은 “저는 작년에 태어나서 아직도 돌도 지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래 그럼 그건 바로 네 아비놈이었구나, 어쩐지 생긴 게 비슷하더라”고 하면서 어린 양을 잡아 먹어버렸다.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논의들이 활발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제안함으로써 쟁점이 되고 있는 이 논의들은 여당 당의장의 선친이 일제시대 ‘헌병오장’이었던 과거가 폭로돼 자리를 물러가야 하는 등 시끌벅적 하다.

맨 앞에 서서 친일 인사들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던 여당 당의장은 앞의 우화처럼 그 ‘아비’ 때문 잡아먹히는 ‘아기 양’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어제까지만 해도 이리 역할을 하는 성 싶더니, 갑자기 어린 양의 역할로 배역이 반전되고 말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경우에도 썩 들어맞는다.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과거 없다”는 다소 궤변적 속언이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만, 과거가 현재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어두운 것이든, 밝은 것이든, 과거를 품고 있기 마련이고 그중 어두운 과거는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조상의 과거를 캐는 것은, 이런 인간의 평상심에 반(反)하는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 당사자들에겐 정신적 고문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평범한 일상의 대화속에서도 삼가하는 예를 갖추는 것이다.

▶ 독재시대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진짜 죽은 이유 등은 재조사 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만, 막연히 일제 치하에서 무슨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의 낙인을 찍고 ‘방문(榜文)’을 내거는 일은 우화 속 이리의 횡포나 마찬가지다. 이를 들춰내고 징벌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잊혀져 가는 ‘아픈’ 과거를 다시 한번 세상의 논쟁거리로 내놓는 것 자체가 트집일 수 있고 억지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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