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한경면 고산에서 태어난 강창일. 어릴적 그는 누구나 그랬듯 농촌의 개구쟁이였다. 그러나 공부를 하거나 노는데도 앞장섰던 그는 불의에 물러서지 않았던 이른바 ‘고산돌팩이’였다.

오현고 3학년 때인 1969년 9월에는 3선 개헌안 ‘국회 날치기 통과’한 것을 보고 분노, 학교 교정에서 3선개헌 반대 데모를 벌이다 대통령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 정학처분을 받는다. 그리고 평생 그의 삶을 규정지었던 ‘정의로운 길’의 이정표가 되었다.

1971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 유신독재에 신음하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눈을 뜨면서, 고향 제주는 강창일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1974년 서울대 4학년 때 유신독재에 반대 데모를 벌이다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 10년형을 언도 받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제주는 4·3의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신음의 섬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왜곡된 제주4·3의 진실만큼은 반드시 밝혀보자”고 다짐했었다.

투옥과 수배 등을 거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80년 10월에야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그 곳에서 ‘제주4·3의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강창일의 ‘4·3의 진실 찾기’ 걸음은 한 번도 샛길로 빠지지 않았다. 1989년 ‘제주4.3연구소’ 창립을 주도했고, 1995년부터 2003년까지 9년 동안 ‘4.3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그 걸음을 재촉했다.

그 결과 국민의 정부 시절 4.3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진상보고서 확정과 2003년 10월 노무현대통령의 공식사과라는 감격적인 자리에 제주도민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던 강창일은 열린우리당에 입당, 탄핵정국이후 대통령 살리기와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제17대 총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 선거에서 초접전을 벌였던 한나라당 현경대 후보와는 1981년 11대 총선에서 현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할 당시 그는 현 후보의 핵심 참모이자 초대 비선관이었다.
그런 그가 현 후보를 누르고 금뱃지를 단 것이다.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한 장본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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